한국사회에 정신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틱낫한 스님은 ‘화’(anger)를 날감자에 비유했다. 감자를 먹으려면 냄비에 넣고 익기를 기다려야 하듯 화 역시 시간을 갖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남을 탓하기에 앞서 울고 있는 아기를 살피듯이 먼저 자신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화가 난다며 바로 행동으로 이를 드러내기 전에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면 훨씬 건설적으로 분노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이었다.
비단 ‘화’뿐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감정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매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지 보다 냉정하고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미국사회 저변에서 확산되고 있는 ‘마음 챙김’(mindfulness)은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둔 명상법이다.
틱낫한 스님의 조언은 화가 나는 상황이라는 ‘자극’과 정말 화를 내는 ‘반응’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두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참을 인(忍)이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도 이런 지혜를 담고 있다. 선조들은 이 속담을 통해 한 순간의 분노로 훗날 크게 후회할 어려움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충분한 거리와 공간이 필요한 일상 속 행위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샤핑이다. ‘충동구매’라는 어휘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본다면 쉬 이해가 갈 것이다. 말 그대로 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을 때 곧바로 집어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충동적 행태를 말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전혀 없다. 충동구매에는 영락없이 후회가 뒤따른다. 그럼에도 충동구매는 반복된다.
충동구매까지는 아니더라도 온라인에서 책을 구입할 때 비슷한 경험들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언론의 서평과 다른 독자들 후기에 한 번 꽂히면 바로 장바구니에 담고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된다. 하지만 막상 책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구매 당시의 흥분이나 기대감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책을 훑어보며 오히려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뉴욕타임스에 재정관련 칼럼을 쓰는 칼 리처즈는 자신의 책 구입 요령을 들려준다. 그는 읽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책을 발견하면 일단 자신이 아마존 어카운트에 만들어 놓은 ‘72시간 목록’으로 보내 저장한다고 말한다. 그리곤 72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여전히 책에 끌릴 경우에만 주문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을 넓힌 결과 자산의 책상위에 속절없이 쌓여가던 불필요한 책들이 확 줄어들었다며 “이것은 거의 모든 재정 문제를 위한 조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페이스북을 열어보지 말라”는 등의 ‘자극’ 관련 조언들이나 “크레딧 카드를 잘라 버리고 현금만을 쓰라”는 식의 ‘반응’ 관련 조언들을 일일이 따르지 않더라도 둘 사이의 거리만 충분히 유지한다면 과소비, 충동구매를 얼마든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극과 반응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게 어찌 샤핑뿐이겠는가. 소비 대신 음식물을 대입한다면 충동적인 섭생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좋은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심리학자인 롤로 메이는 “자유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멈추는 데 있다. 멈추는 곳에서 선택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둘 사이의 자동회로를 차단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극과 반응 사이의 거리는 선택의 자유가 숨 쉬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새해가 시작되면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다짐들을 하게 된다. 거의 모든 다짐들은 결국 자극과 반응 사이의 거리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한해’를 정유년의 개인적 화두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 둘 사이의 자동회로를 제대로 차단하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자초하고 인간관계에서 후회할 일 많이 만드는 한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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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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