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춘대원군‘으로 불리며 박근혜 정권을 막후에서 주물러온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구속됐다. 박정희 시절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무수한 정치공작 의혹 속에서도 법률지식을 활용, 미꾸라지처럼 사법처리를 피해왔다고 해서 ’법꾸라지‘라는 별명까지 붙은 그가 생애 처음으로 철장 속에 갇히는 굴욕을 맛보고 있다. 김기춘의 구속을 보며 떠올린 것은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서 성긴 듯하지만 결코 놓치는 일이 없다”는 도덕경 속 노자의 말이다.
법망에는 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구멍을 잘 찾아 빠져나가는 얄미운 인간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때 영화를 누리고 세도를 부리는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는 죗값을 치르게 돼 있다는 게 도덕경의 교훈이다. 김기춘은 무수한 악행에도 불구하고 평생 미꾸라지처럼 사법적 단죄를 요리조리 피해왔지만 결국 말년에 하늘의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김기춘은 국회의원으로 한창 잘나가던 10여 년 전 한 방송 인터뷰에서 자신은 항상 법과 원칙을 지켜왔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듯 아무 일 없었겠느냐며 과거 행적에 대해 자랑스럽다는 듯 떠벌렸다. 어떤 후회나 반성의 기색도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며 그 뻔뻔함과 오만에 섬뜩함까지 느꼈다.
어느 시대 어느 정권아래서도 권력자에 빌붙어 악행과 불의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인간들은 있어왔지만 박근혜에 부역한 무리들만큼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이었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박근혜의 헌정유린과 비리를 떠받친 두 세력은 교수들과 검사출신들이다. 이른바 대한민국의 엘리트로 불리는 지식인 계층이다.
머릿속에 든 것을 토대로 교수도 되고 검사도 되고 결국 대통령의 참모와 각료가 됐지만 이들이 보인 행태는 지식인이라기보다 범죄조직의 하수인에 가까웠다. 대통령을 바로 보좌하기는커녕 그릇된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데만 충실했다. 공익을 위해 사용해야 할 지식을 사익과 불의한 권력을 지키는 데 활용했다. 범죄혐의가 명백히 드러난 이후에도 거짓말과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태도에서는 엘리트로서 일말의 명예의식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들의 민낯을 확인하면서 인간의 ‘지식’과 ‘성숙’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머릿속에 지식은 가득 들었지만 기본적인 옳고 그름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일그러진 엘리트들은 몸과 정신의 성장이 균형을 못 이룬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한국은 국민들의 학력수준과 사회적 성숙도 간에 불일치가 가장 심한 나라라는 수치스러운 조롱이 뒤따라 다닌다. 그 가운데서도 이런 불일치가 유독 극심한 계층이 엘리트들이다.
지식은 많지만 성숙과는 거리가 먼 이런 부류를 사회학자 노명우는 ‘배운 괴물들’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면서 괴테와 괴벨스를 예로 든다. 두 사람 다 유려한 문장가였지만 괴테는 그 능력으로 시대를 뛰어 넘는 대문장가가 된 반면 괴벨스는 히틀러 정권에 부역하면서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궤변을 만들어 내는데 자신의 재주를 썼다. 배웠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든 사회를 크게 해치는 괴물이 될 수 있다.
박 대통령과 재벌들 간의 정경유착 심부름꾼 역할을 했던 안종범 전 경제수석은 지난 주 재판에서 “검찰수사 초기에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묵비권을 행사하려 했지만 ‘역사 앞에 선 것인 만큼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변호인단 설득을 받아들여 다 이야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왜 처음부터 역사 앞에 선다는 자세로 공직을 수행하지 못한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지식인의 종말’을 쓴 프랑스 리옹 대학 레지 드브레는 “과거의 지식인은 시대를 명료하게 해석해 주었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시대의 어둠에 어둠을 더할 뿐”이라고 말했다. 마치 오늘의 한국사회를 향한 일갈처럼 들린다. 지식이 흉기가 될 때 그것으로 인한 해악과 폐해는 흉악범들이 휘두르는 칼날에 비할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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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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