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개리슨 케일러는 ‘위비곤’이라는 가상의 호수를 만들어냈다. 이 호숫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기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잘 생기고 똑똑하고 강하다고들 생각하며 살아간다. 작가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인간의 속성을 꼬집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
이런 기본적인 속성에 더해 “당신 잘났다”고 주위에서 한껏 치켜세우고 부추기기까지 하면 착각은 더욱 팽창한다. 하지만 한껏 부풀어 오른 착각은 대부분 냉정한 현실 앞에서 바람 빠진 열기구처럼 추락하곤 한다. ‘위비곤 효과’는 이런 자기기만과 착각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임기를 마치자마자 험난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누려온 반 전 총장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자신의 한 몸을 불사르겠다는 비장한 출사표와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귀국 후 그가 보여준 행보는, 이미 예견된 것이긴 하지만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탄핵 전에는 뚜렷한 대권주자가 없었던 친박의 경주마로, 또 탄핵 후에는 멘붕과 아노미에 빠진 보수진영의 희망으로 그에게 쏠린 기대가 반기문의 대권 욕심을 자극했을 것이고 그 자신도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판단을 했을 터이다. 한동안 여론조사 1위를 달렸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망은 점차 허황된 꿈이 돼가고 있다. 귀국 후 계속 떨어지는 지지율이 그것을 말해준다. 한번 하락세로 돌아선 지지율을 되돌리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일부 언론들에서는 반전의 기회 운운하지만 민심은 항공모함 같아 일단 흐름이 형성되면 방향 바꾸기가 만만치 않다. 무명의 후보라면 현재 지지율이 낮더라도 상승의 여지가 있지만 반 전 총장처럼 널리 알려진 후보의 부진은 대중의 실망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호전의 여지가 적다.
하락하는 지지율이라는 현실적 상황 외에 반 전 총장의 자질 또한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잘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다. 반 전 총장은 평생 외교관 길을 걸어왔다. 그가 정권이나 대통령에 관계없이 평생 꽃길을 걸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외교관이라는 자리의 특성과 직업적 능력, 그리고 뛰어난 처세 덕이다.
그러나 정치인, 특히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외교관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쓴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책임윤리’와 ‘신념윤리’를 정치인의 기본 자질로 꼽았다. 귀국 후 반기문의 발언과 행동은 책임이나 신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외교관이 정치를 해선 안 된다는 어떤 법률조항도 존재하지 않지만 두 역할이 요구하는 바탕은 분명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대학농구 감독들이 흔히 프로에 가서 실패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학생선수들을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멘토와 교사로서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자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 최고기량의 선수들을 다뤄야 하는 프로는 완전히 다른 리더십과 접근이 요구된다.
반 전 총장은 시운과 관운, 그리고 정부와 국민들의 전폭적 지원 덕으로 유엔총장이라는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작가 유시민은 한 시사프로에서 대권을 꿈꾸는 반기문에 대해 “공공재, 즉 대한민국이 밀어준 유엔총장이라는 명예를 개인적인 것처럼 소모하는 걸 보면 불편하다”고 꼬집었다. 반기문은 한국 정치판의 지도자로는, 그것도 격변기를 헤쳐가야 할 다음 대통령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대통령 되는 것만이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일은 아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겨 두면 된다. 심리학자 톰 길로비치는 “우리를 곤란에 빠뜨리는 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이 하루속히 위비곤 마을을 떠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것이 그나마 남은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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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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