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일년만에 휴가를 즐기러 온 막내아들과 여자친구를 데리고 그랜드 캐년을 찾았다. 다행히도 큰 변화없이 옛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지구 온난화로 암석의 변화가 있었겠지만, 나의 어두워진 눈에는 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국어책에서 피천득님의 그랜드 캐년 수필을 처음 읽었을 때, 얼마나 가고 싶어했던지, 나의 첫 미국여행도 그랜드 캐년에서 시작했었다. 그 거대한 자연의 웅장함과 조물주의 위대하심, 시시각각 변화하는 계곡의 아름다운 암갈색 바위들의 잔치… 삼십여년을 가슴설레며 기다려왔다는 인내심과, 드디어 그리움에 목메이던 짝사랑의 대상을 현실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기쁨 등등이 합해져 나의 여행은 즐거움의 극치였다.
이번에 그랜드 캐년에 도착하니 비수기 평일 오후라서인지 생각 외로 한가했다. 차로 반쯤 보고 나니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주변이 어두워지니까 라스베가스로 4시간 운전을 하고 다시 돌아갈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나의 무뎌진 감정 때문인지 “아, 너무 좋다!”라는 감탄사 이외에는 특별한 감흥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만 바빴다. 아쉽지만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위로하며 발길을 돌렸다.
여행을 하려면 다리가 떨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가슴이 떨릴 때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는데 역시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젊었을 때 느꼈던 섬세함이나 감흥이 줄어들었고, 환갑이 지난 나이에 마음은 청춘처럼 끼니도 굶어가면서 서너시간 쉬지 않고 아들과 번갈아 가며 운전을 했더니 차에서 내릴 때 어지러웠다.
고등학생 십대에는 책과 영화를 통해 접했던 그랜드 캐년에 상상력과 꿈이 더해져, 죽기 전에 꼭 가봐야 되는 버켓 리스트에 탑 자리를 차지했고, 삼십대에 처음 그랜드 캐년을 방문했을 때는 꿈이 실현되는 기쁨과 위대한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기쁨을 가졌고, 그후 서울에서 오는 친척들의 여행 가이드가 돼서 너댓번 더 방문했던 사십대에는 경이로운 자연의 조화에 머리가 숙여지더니, 오십대에는 “와, 정말 위대하구나!”라는 느낌이였고, 60대에는 “이 굉장한 조물주의 위대한 작품이 오랫동안 잘 관리가 되어 후손들도 감탄하며 감상할 수있기를…. ”이라는 간절한 바람이 생겨났다.
아마도 70대가 되어 또다시 그랜드 캐년을 방문하게 되면 미안한 말이지만 “아이구, 다리야. 옛날이랑 똑같네!”라고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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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례(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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