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서울 맹학교의 고등부 아이들에게 방과후 교육 과정으로 현대 문학을 가르쳤던 적이 있다. 기간은 대략 1년 8개월 정도였고, 내가 맡은 학생은 모두 여섯 명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시각 장애인을 위한 특수 시설이 갖춰진 교내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세상 모든 십대들과 다르지 않게 한창 질풍 노도의 사춘기를 겪는 중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상황이었다. 등록금도 벌고 싶었고, 세상 경험도 쌓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마음대로 책 읽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중 맹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유는, 아무래도 세상 경험을 쌓아볼까 하는 쪽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가족 중에 단 한 명의 장애인도 없었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모든 것이 평범했다. 모의 고사에 긴장하고, 수능 점수 안 나올까 전전긍긍하는 고등학생 여섯 명이 모여 공부하고, 수다 떨고, 간식 먹는 일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리는 봄기운에 들뜬 마음에 다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까운 경복궁으로 소풍을 나가 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학교는 효자동이었으므로, 경복궁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지하철을 좋아했다. 서울 지하철 차량들의 고유 번호를 외워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맞추는 것이 아이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이었다. 우리는 안국역까지 한 정거장을 갔다가 다시 경복궁역으로 돌아와 소풍을 하고, 또 한번 지하철을 타고 이번엔 반대 방향인 독립문역까지 갔다가 경복궁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총 네 번 각기 다른 차량을 타 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이상해진 것은 안국행 지하철에 막 탑승했을 때였다. 사람들이 앞다투어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만석인 차량도 아니었다. 심지어 연세가 꽤 드신 분들이 노약자석을 내 주시겠다며 아이들을 잡아 끌었다. 정중히 거절해도 막무가내였다. 가엾다며 용돈을 쥐어 주는 아주머니도 계셨다. 나에게 젊은이가 고생이 많다며, 훌륭한 일을 한다고 칭찬하는 어르신도 계셨다. 우리 아이들과 또래인 고등학생 소녀들이 구석에서 수군거렸다. “불쌍해.” 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싶어졌지만, 그러지 못했다. 모두 친절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우리는 말없이 고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걸어서 효자동 기숙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조용히 울었는데, 눈 멀고 귀 밝은 아이들이 앞다투어 등을 토닥거렸다. 진짜 친절함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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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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