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연년생 여동생이 하나 있다. 유망하고 대우도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갑자기 중국 어학연수를 떠나버려서 뭘 잘못 먹었는가 싶었는데, 한 해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북경에서 취직을 해 버렸다. 자신의 전문 분야인 소셜 마케팅이 급성장하는 중국 시장을 경험해보고 싶다더니, 신나게 구르고 깨지며 실컷 겪어보는 중인 것 같다. 다행히 한국 대기업의 중국 지사에 들어가서 벼락치기 중국어 공부로도 잘 버티는 중인 것 같다. 용감한 여자다.
우리 자매가 태어난 80년대 중후반의 대한민국은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과 성 감별 기술의 발달로 사상 유례 없는 여아 저출산의 시기였다. 믿거나 말거나,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 선거에 나갈 때마다 암탉이 울면 재수없다며 야유하는 남자애가 꼭 있었다. 적극적으로 여아 낙태를 행했던 부모/조부모 세대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였다. 그러나 딸만 둘 가진 우리 집 분위기는 달랐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못할 일이 없으니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마가렛 대처, 힐러리 클린턴, 한비야 같은 여성들이 우리의 롤 모델이었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미래가 여성 리더를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얼마 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소위 ‘고스펙 여성’ 탓에 저출산 문제가 심화된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성이 자신의 경력 쌓기를 결혼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에 저출산이 심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가임기에 외국으로 나가 자신의 경력 발전에 힘쓰고 있는 내 동생은 대한민국 저출산의 원흉이고, 높아진 눈을 낮춰 상대방 수준 따지지 말고 하루 빨리 결혼해 자식을 생산하여야 바람직하다.
우리 자매가 어린 시절 꿈꾼 21세기 여성의 삶이란 고작 알 낳는 암탉 정도가 아니었는데, 국책 연구기관이란 곳의 수준이 심히 실망스럽고 시대착오적이다. 지난 금요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선고했다. 그녀는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파면 사유는 그녀의 성별과 관계없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녀는 여성이기 때문에 파면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실패가 대한민국 여성 리더의 실패를 상징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들의 미래를 그려 보고 있을 한국의 어린 소녀들이 꼭 그 점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여담이지만,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권한대행 역시 여성이다. 비록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사회이지만, 시대의 중요한 장면의 중심에 당당히 서 있던 또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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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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