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은 정치인의 임명과 면직을 결정하는 ‘임면권’이 온전히 국민들에게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선거를 통해 국가를 운영해 갈 책임을 지닌 대통령을 선출했던 국민들은 대통령이 부여된 소임을 등한시한 것으로 드러나자 대리인단인 국회를 통해 그의 해임을 결정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탄핵인용을 통해 국민들과 국회의 결정이 법률적으로 완벽히 유효하다는 최종판단을 내려줬다.
소유주의 위임을 받은 전문경영인이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부도덕하기까지 하다면 가차 없이 해고하는 게 당연하다. 국민과 대통령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헌재의 판결은 법전과 교과서에나 실려 있는 화석화된 원칙인줄 알았던 ‘주권재민’을 생명력을 지닌 현실의 단어로 소생시켜 주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에서 시작돼 헌재의 탄핵결정으로 막을 내린 지난 5개월 동안의 박근혜 게이트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준 고발 다큐멘터리이자 교육용 드라마였다.
민주주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자 결과인 현상은 ‘공공성의 실종’이다. 국가는 공공성 위에 존재할 때 비로소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를 달 자격이 생긴다. 이것이 후퇴하고 사적인 요소가 공적 영역을 장악하기 시작하면 국가는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한다. 꼭 총칼을 앞세워야만 독재가 아니다. 바로 이런 게 독재다.
독재 권력은 권력자 개인의 관점과 이해관계가 국가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일그러진 형태의 정치체제이다. 형식과 절차는 그럴듯해 보여도 실제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기만적인 정치권력이다.
권력자 한사람의 고집과 취향 때문에 국가 과제가 왜곡되거나 뒤틀린다. 심지어 공적 영역의 최후보루가 돼야 할 국기기관들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마구 동원되기까지 한다. 그동안 우리는 이 같은 국가의 사유화 현상을 지겹도록 목격해 왔다.
공공성이 실종되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은 국가를 절대시하는 ‘국가주의’의 기승이다. 권력자에 대한 비판은 국가에 대한 모독 혹은 애국심 결핍으로 매도되면서 탄압과 불이익의 대상이 된다.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자 “무능과 오만, 그리고 사욕이 만든 야만의 시대”라는 비판과 한탄이 쏟아졌다. 지난 몇 년 동안 반복돼온 퇴행과 권력자의 시대착오적 언행을 보면 ‘야만의 시대’라는 진단이 딱 들어맞는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쓴 ‘리바이어던’(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바다괴물의 이름)에 더할 수 없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책을 보면 “주권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회충처럼 신체를 괴롭히는 자” “폭동은 폐병” “국가를 개혁하려고 불복종하는 사람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문구들이 나온다. 구세대들이라면 이와 비슷한 말을 학교와 교회 같은데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지 않았던가. 친박 집회장을 뒤덮었던 구호들도 이와 유사하다.
“국가는 몸이기 때문에 그 어떤 비판도 곧 국가를 해하는 일”이라는 리바이어던 식 사고방식이 21세기 민주국가라는 나라의 지도자와 추종자들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고 ‘종북딱지’ 놀이가 횡행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박근혜 탄핵은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안겨주고 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로 꼽히는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민주주의는 폭력 없는 개혁을 허락하기 때문에 모든 합리적 개혁을 위한, 말할 수 없이 값진 전투의 장을 마련해 준다”고 했다. 그 값진 전투의 장이 지금 우리 앞에 다시 한 번 펼쳐지려 하고 있다.
헌재의 역사적 판결이 거짓과 탐욕으로 점철된 ‘야만의 시대’에 대한 사망선고였다면, 시민들의 정치과정에의 빠짐없는 참여는 잃어버린 민주주의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새로운 장정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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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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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riter boasts about his list of books but fails to deliver focused po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