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되면 연건동 대학 캠퍼스에는 우리집에는 없던 연보라빛 라일락꽃이 진한 향내음을 뿜으며 흐드러지게 피었다. 새내기 신입생에게는 대학생활의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일락 향기를 마음껏 들여마실수 있었던 것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유난히도 봄비가 많이 내리는 4-5월에는 우산을 받쳐들고 비에 젖은 라일락을 감상하는 것도 약간 로맨틱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유신 정권 시절이라 길 건너 동숭동의 문리대에서는 학생들이 매일같이 데모를 하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는 “저 학생들은 대한민국 최고 학부에서 비싼 등록금 내고 공부는 안하고 왜 데모만 하나?” 하는 게 의문이었다. 학생 데모로 거의 매일 휴강만 하고 강의는 없으니 공부에 재미가 붙을 리가 없었다.
학교를 가기는 가는데 휴강 사인을 보면 친구와 나는 “또야?” 혹은 “신났다”라며 음악 다방이나 신청곡을 받는 레스토랑으로 가서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허접스런 불량식품을 양손을 써가며 커피와 함께 맛나게 먹었다.
그 당시에 내가 즐겨 신청했던 노래는 윤형주의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라는 가사의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이 노랫가사처럼 교정에서 라일락꽃도 만나고 미팅도 열심히 하여 남자 친구들도 만나고, “첫사랑은 깨어지는데 의미기 있다”는 말도 안되는 친구의 궤변에 그러냐고 응수하며 친구 데이트에도 따라다니고… 그럼에도 내가 이세상에서 최고인 줄 알았던 참으로 어리석고 우매했던 나의 20대는 그렇게 흘러갔다.
세월이 흘러 50세에 미국 의사 시험에 붙고 펜실베니아로 3년간의 가정의학 전공의 생활을 하러 떠나는 남편과 동부로 이사를 갔다. 영어도 짧은 그 당시에 눈이 무릎까지 쌓인 추운 겨울에 옥션을 통해 80년 된 집을 사게 되었다.
이듬해 봄에 수선화가 눈속에서 피어나고 고목에서 라일락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런데 그 라일락에는 향기가 없었다. 그때의 실망감이란… 매일 라일락을 보며 “너는 왜 향이 없니?” 라며 타박을 했다. 올봄에는 황무지 같은 뒷뜰에 향이 짙은 한국산 라일락 나무를 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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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례(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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