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미국 범죄소설의 대가인 제프리 디버의 <12번째 카드>라는 책이다. 별 기대 없이 시간 때우기 용으로 집어든 책이었는데,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추리소설의 재미와 더불어 1860년대 남북전쟁 무렵의 미국사회를 들여다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
이 소설은 찰스 싱글턴이라는 해방 노예를 중심으로 당시 노예제를 둘러싸고 사분오열된 미국사회를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남북전쟁하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의 주들과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의 주들이 치른 전쟁이며, 다행히 링컨 대통령의 리더십 하에 북군의 승리로 끝나 미연방제가 유지되었다는 정도의 상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단 몇 줄로 요약되는 이 사실 안에 얼마나 복잡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이 내재해있을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북부에서 발생한 징집 반대 폭동이다. 노예제 폐지에 심정적으로 동조했던 사람들일지라도 내 남편이나 내 아들이 전쟁터로 끌려가야 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특히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주로 아이리시 이민자들)은 자신들만 일자리를 잃고 전쟁터로 끌려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당시 부자들을 돈을 내면 합법적으로 징집을 피할 수 있었으며, 흑인들은 나중에 지원병 형태로 군 입대가 허락됐다).
무려 4년이나 계속됐던 전쟁이 끝나고 수정헌법 13조를 통해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는 금지되었지만, 각 주의회들은 흑인들의 취업이나 교육, 참정권, 재산권 등을 제한하는 각종 법령을 앞다투어 쏟아냈다. 남북부를 통틀어 62만명이나 되는 젊은들이 사망했으니 (사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흑인들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하늘을 찔렀던 것이다.
결국 연방의회는 주정부가 흑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수정헌법 14조를 제정하기에 이른다.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을 미국시민으로 규정하고 그 어떠한 주도 미국시민의 특권 또는 면책 권한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거나 강제해서는 안 되며 어떤 주도 법의 적정 절차 없이 개인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훗날 미국 민권운동의 금과옥조가 되는 이 수정헌법은 사실 해방된 노예들과 그 후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싱글턴이라는 해방노예는 이 수정헌법 14조를 둘러싼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면서 파국을 맞는다. 책을 다 읽고 실제로 자료를 찾아보니 이 수정안은 각 주의 맹렬한 반발에 부딪혀 우여곡절 끝에 의회를 통과하고도 2년 후에야 비준이 이루어 진 것으로 나와 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거친 후 노예제를 폐지하였다”는 단 한줄로 서술되는 역사가 사실은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역사의 진보였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기고 있을 즈음, 한국에서는 마침내 세월호가 3년 만에 그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쉽게(물론 쉬운 과정은 아니었겠지만)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을 왜 이리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을까”하는 탄식과 더불어 “앞으로 또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이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 하는 아득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 팽목항에는 5,000명의 추모 인파가 몰리고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10만 시민이 참석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2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광화문 앞을 지나던 택시 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생떼를 쓰고 있을 거냐”고 일갈하던 그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보고 있는 작금의 한국 상황도 훗날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고 박정희 신화도 그 빛을 바랬다”는 한 줄로 요약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 한 줄의 역사가 기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이 따랐을지 잊으면 안될 것이다.
역사는 순리대로 흐르지만 매우 더디게 흐르며 그 과정조차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의 진보를 믿되, 결코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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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국제 로타리클럽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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