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눈에 익은 고교 동창생 이름을 보았다. 그 동창생과는 한 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지만, 그녀는 당시 700명 가량 되는 동기생 중에서 줄곧 전교 일등만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창생들은 그 친구가 어떤 대학에 진학했는지 정도까지는 알고 있었다. 약력이라든가 올라와 있는 사진의 모습에 학창시절 얼굴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러시아어어를 공부하여 박사학위까지 딴 뒤, 그녀의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유투브에서 이름 석 자를 치니, 러시아 작가들에 관한 그녀의 강연이 줄줄이 올라왔다. 그 중에서 토스토옙스키를 다룬 강연을 보자, 이 작가의 대표작으로 고등학교 시절 필독도서였던 “죄와 벌”을 읽던 때가 떠올랐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이고 살인자가 되었다. 그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을 죽였을 뿐이라며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없었지만, 피의자로 형사의 심문을 받을 때마다 그가 한 일이 탄로날까봐 무척 초조해하였다. 이때의 심리적 압박감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어찌나 잘 그려졌던지 마치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손에 땀을 쥐어가며 페이지를 넘겼더랬다. 그래서인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 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때 느꼈던 숨막히던 긴장감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토스토옙스키는 국가의 특별 단속 기간에, 한 모임에서 불온문서를 낭송했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 집행 바로 전에 감옥형으로 변경되어 시베리아에서 4년간 옥살이를 했는데, 이 체험은 라스콜니코프가 자수한 뒤에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살면서 선택의 순간들을 많이 접해왔지만, 가장 후회스러웠던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현실적 욕심 때문에 놓쳐 버린 번역가의 길인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조교를 하고 있던 때에, 교수님 추천으로 문학 작품 번역일이 들어왔었다. 그런데 원고료가 당시 하고 있던 잡지사 번역보다 턱없이 낮아서 어린 마음에 그 일을 고사했다. 물론 그 일을 선택했었다 해도 내가 번역가로 성공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동창생 소식을 접하니 다시금 후회스러워졌다.
내년은 나의 띠인 무술년이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진 지금, 이제라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일에 매진해야겠다. 새로 태어난다는 마음가짐과 아직 늦지 않았다는 희망으로 또 다른 60년을 바라보자.
<김희원(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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