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처음으로 홀로 서울의 친정에 갈 기회가 있었다. 남편을 동반하지 않는 여행의 은근한 홀가분함과 함께, 미시간의 시어머니께 작은 심부름 거리도 하나 받아 왔다. 용한 곳에 가서 가족들의 사주를 좀 보고 오라고 하셨다. 한동안 마음자리가 뒤숭숭하신 모양이었으니, 내가 조금 품을 팔아 편케 해드리자 싶어 물어 물어 용한 집을 찾아갔다. 점집은 좁은 언덕길 위의 낡은 빌라 2층에 세 들어 있었다.
배달 음식점의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은 현관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나오고, 그 끝에 불 켜진 조그만 방이 있었다. 방 안에는 건포도처럼 작은 노파가 앉은뱅이 상을 앞에 두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가 시댁 식구들의 사주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온 가족의 사주를 다 본 후, 그녀는 나의 것도 보자며 새 종이를 꺼냈다. 침침한 눈을 찡그리며 나의 사주를 받아 적더니, 첫마디가 기가 막혔다. 팔자에 천고가 들었구나, 태어난 땅에 죽지 못하고 평생을 떠도는구나.
태어난 땅에 살지 못하고 있으니, 태어난 땅에 죽지 못할 것도 그럴 듯하다. 아직 젊은 나이인지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탓에 점쟁이의 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인생인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러다 문득, 이민자들의 팔자란 모두 고독한 팔자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정말일지도 모른다.
떠나온 지 고작 5년, 서울은 갈 때마다 낯설다. 좋아했던 식당이 문을 닫았고, 지하철 노선에는 없던 역들이 생겨났다. 영풍문고는 내부 디자인을 새로 했고, 자주 가던 소극장은 카페가 되었다. 모두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결국, 아주 낯설어질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이제 그곳에 내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데, 아직 여기에도 내 자리는 없다. 어쩌면 이민자의 고독이란 낯선 곳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듯 내 자리가 있던 시간들은 잊혀져 가고, 운명이 데려다 놓은 곳에서 내가 누구인지 몰라 황망한 삶. 태어난 땅에 못 죽을 팔자인 나는, 죽을 땅을 사랑해보려고 애쓰다 죽을 것이다. 그것이 외로운 짝사랑일까 두려워 잠 못 이룰 많은 밤들 뒤에, 큰 물음표 하나 가슴에 품고. 정말 그럴까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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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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