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는 골프장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이 있다. 하나는 수백 마리의 거위들이 가족단위로 푸른 잔디를 소풍 나온 듯 애교스러운 걸음걸이로 한가하게 거니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때론 장난을 치며 재롱도 부리는 대 여섯 마리의 귀여운 금빛 여우가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이다.
거위 가족들은 요즈음 막 부화한 앙증맞은 아기 거위 세 네 마리씩을 데리고 유유히 산책을 즐기는데, 날아오는 공이 위험하다 싶으면 성깔 있는 모습으로 뒤뚱뒤뚱 파닥파닥 날개 짓을 하며 새끼 방어가 대단하다. 내가 공을 찾아 그들 근처에 가면 목을 꼿꼿이 세우고 길고 뾰족한 입을 크게 벌린 채 곧 달려들 태세를 취해 겁을 준다.
여우는 수풀에 앉아 내가 카트에서 내리기를 기다리는데, 혹시 챙겨갈 음식이 있을까 내가 내리기가 무섭게 가방을 뒤질 요량으로 눈치를 보며 내 앞에 앉아 조르듯 눈을 맞춘다. 처음 여우를 봤을 때는 신기하고 무섭기도 했으나, 이제는 친근감이 들어서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최근 새끼를 네 마리나 낳기도 했지만 털갈이 때여서 여우들 모두 볼품이 없는데, 특히 수컷은 허기지다. 전에는 먹을 것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바로 먹어치웠지만, 새끼와 젖을 먹여야 하는 여우같은 마누라를 위해 먹을 것이 생기면 입에 물고 돌아서 간다. 그 뒷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때로 가방에서 먹을 것이 안 나오면 복수하듯 폰이나 지갑을 여우 굴 앞에 챙겨두어 사무실 사람이 찾아다 준다.
여우에게 거위새끼는 맛있는 한 끼 요리고 재빠른 여우가 거위새끼 한 마리를 물어 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겠으나, 여우는 거위근처는 얼씬도 않는다. 새끼를 위해 자기보다 몇 배나 큰 사람들에게 전혀 기죽지 않고 덤비는 위세를 보았거나, 깡패 같은 거위들에게 집단으로 혼난 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거위와 여우, 여우와 나, 거위와 나....얼핏 보면 팽팽한 긴장과 두려움이 느껴지는 이상한 조합이고, 특히 여우와 새끼를 거느린 거위가 한 공간에 산다는 것은 위험한 동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관찰할수록 동물의 삶에도 그럴만한 이유와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알수록 친밀감이 생기며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마음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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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북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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