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 손님이 뜸하여 한가한 오후, 창 밖 담장너머 수많은 잎새들 위에 햇빛 찰랑이는 나무를 본다. 느닷없이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온다. 아픔같기도한 그 싸아한 느낌은 마치 바람이 그리로 불어 지나가면서 휑하니 구멍을 뚫어놓은 것처럼 허전하여 공연히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는다. 불현듯 미치도록 돌아가고픈 어느 시간, 어느 장소들이 단편적으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떠오른다. 인상깊은 장면이 있었다거나 특별히 즐겁거나 행복했다거나 하지도 않았던 평범한 날들 중 어느날, 가로등 빛이 흩뿌려지던 보도, 사람들이 여기 저기 쏘다니던 거리의 밤 공기, 한 여름 햇빛에 하얗게 바랜 어느 오르막길, 고속도로 변 너른 들판을 불던 바람, 차 창으로 끊임없이 다가들었다 멀어져 가는 풍경, 푸른 표지등이 박힌 거리에 울리던 내 발자욱 소리… .
그런가하면 아무 일도 없는 듯 기억의 바다 저 깊은 곳에 잠겨있다 갑자기 소용돌이치며 수면 위로 떠오르는 회한들로 또한 가슴이 사무친다. 그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 내가 주고 또 받았던 상처들, 미래의 길들을 바꾸어버린 많은 사소한 선택들, 그리고 좁은 소견과 철 없음, 각박함이 저지른 돌이키기 힘든 과오들… . 내일이 기대되고 흥분되고 설레이는 삶은 영영 오지 않을 듯 가버린 걸까. 여행을 떠나기 전처럼 들뜬 마음으로 채워져 있는 삶은 지속되기 힘든 것일까.
이즈음 내 일상은 그저 그렇게 아무런 설레임도 주지 못한채 흘러간다. 간혹 변화라는 것이 건강의 문제라든지 세금 문제라든지 별로 반갑지 않은 일들이 일상의 지루함을 덜어주려는 듯 일어나 한바탕 난리법석을 치루는 일뿐, 의무처럼 산다는 느낌이 내 일상을 더욱 무겁게 한다. 어쩌면 한치의 여유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이 반복되는 이즈음의 일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부터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나 풍경들이나 사람들로부터 감동받는 일들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그저 뻔한 이야기, 굉장한 것들의 그 저변에 도사리고 있을 반대급부의 의도나 희생, 그런 것들이 보이고서부터일 것이다. 나는 순수를 잃어가고 있다. 웬만해서는 가슴이 요동치지 않는다. 아니 그럴까봐 겁부터 난다. 어떤 일에도 매진하지 못하고 시큰둥하다. 일상이, 삶이 마치 졸고있는 듯하다. 이러한 것들이 늙어감의 증세라면 진정 두려운 일이다.
세상으로부터 입었던 상처는 회복되고 부러졌던 뼈도 더욱 단단히 붙었지만 감각은 무디어지고 마디는 구부러지지 않고 단련된 머리는 영악하게 돌아간다. 덤벼들기도 전에 아플걸 미리 알고 뒤로 물러선다. 똑바로 걸어가면 부딪힐 것을 알기에 멀찌감치 에둘러 간다. 하고싶은 일 앞에서 저울질을 한다. 내가 지금 이 시간 과거의 어느 순간들, 그리고 장소들로 돌아가고픈 충동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렇다, 나는 순수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이 졸고있는 삶을 깨우고 싶은 것이다. 바보같더라도, 과오로 부끄러울지라도 나는 그립다. 그 철없음이. 또 다른 미래에 분명 나는 수많은 상처들, 잘못된 선택들, 돌이키지 못할 과오로 인하여 아플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무엇인가. 삶에 완벽함이 어디 있기나 한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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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자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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