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꽤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기분좋게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주차해 두었던 자동차 유리창이 깨져 있었다. 누군가 유리를 부수고 트렁크에 있는 물건을 훔치려 했던 흔적이 보였다. 맑은 날씨와 자연을 즐기고 상큼하던 기분은 날아가고,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등산객들을 노리고 아침부터 나와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범죄의 대상이 된 것 같아 화가 났었다. 다행히도 차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기에 빈손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비교적 작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지만, 그후 주차를 할 때마다 망설여지게 되었다.
주위에 알리고 나니 사라진 것은 없는지 유리창은 고쳤는지 걱정을 해주었다. 나는 이를테면 ‘모범’의 피해자이다. 한밤중에 귀중품을 보이는 곳에 놓고 주차한 것이 아니었다. 차는 정말 깨끗했으며, 이른 아침 교통이 많고 집 좋은 동네에 주차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나의 피해가 어떻게든 나의 탓이거나 꾸민 일이라고 묻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가정 그리고 데이트 폭력, 또 성폭력의 피해자들에게는 항상 주어지지 않는 공감과 믿음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피해를 본 후 수많은 질문이 그들을 또다시 학대한다. ‘왜 헤어지지 않고 도망치지 않았어?’ ‘네가 화를 나게 했으니까 그랬겠지.’ ‘술에 취해 있었던 건 아니고?’ 피해자는 가해자마냥 심문을 당한다.
텔레비전이나 공익광고를 생각해보면 가정 및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들은 ‘결혼한 가정의 아이를 둔 젊은 백인 여성’이며 신체적 위협을 받은 멍들은 얼굴 따위를 보여준다. 이것이 ‘모범적’인 피해자의 형상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피해자들은 각양각색이고 폭력은 피해자를 가리지 않는다. 남성일 수도 있으며, 가해자와 동거 중이지 않을 수도 있다. 노인일 수도 있으며,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 또는 경제적인 학대를 받고 있을 수 있다.
피해자는 부자일 수도 있고, 꽤 좋은 직장과 학벌이 배경일 수 있다. 처음 받은 학대에 바로 신고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도움받을 가족이나 주변인이 있지만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범 피해자’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면 피해자들은 의심을 받거나 범죄가 피해자의 탓이라고 질타를 받는 때도 있다. 피해자와 공감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피해자가 ‘모범’이 될 필요는 없다. 잘못된 ‘모범적인 피해자’의 이미지 때문에 신고를 주저하거나 도움을 받지 못하시는 경우가 없어졌으면 한다.
<정조은(KCCEB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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