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요인터뷰]6.25 제1보 방송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씨
▶ 김구 선생 장례식 실황, 9.28 서울수복 제1보도 전해…일본 유엔 총사령부 방송 22년 등 전쟁이 바꾼 삶
72년 도미...생업 전선 속 다작 수필가로 활약
한국전 67주년 행사 초청돼 당시 육성 재현“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군이 건재하니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인 1950년 6월25일 새벽 6시30분. 한국 공립방송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의 덕수궁 뒤 스튜디오에서 6.25 전쟁 발발의 제1보를 알렸던 긴박한 라디오 방송의 내용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던 위진록(89)씨는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백발 신사가 됐다. 그러나 22세 팔팔한 청년이었던 당시의 방송을 여전히 생생하고 또렷이 기억한다. 만 19세 때 당시 공영방송의 최연소 아나운서로 발탁된 그는 북 남침 1보 방송 뿐 아니라 1949년 김구 선생 장례식 실황중계, 그리고 9.28 서울수복 제1보 방송 등 역사적인 순간들을 생생한 육성으로 한국민들에게 알린 원로 방송인이다. 그리고 1972년 도미한 올드타이머로, 미국 이민 생활 속에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한 수필가이기도 하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던 한국전쟁 발발 67주년을 맞아 위씨는 ‘6.25 남침 제1보 방송자’로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 6.25 기념행사에서 당시 1보 방송을 육성 재현하고 전쟁의 교훈을 되새기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서울에서 다시 맞은 한국전 67주년이 남달랐다는 그는 “무관심처럼 위험한 게 없다”며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나라와 자유를 지키겠다는 절박한 자세가 필요함을 다시 느꼈다“고 말했다. 다음은 서울을 방문 중인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한국에 초청돼 6.25 67주년을 맞았는데
▲국가보훈처의 특별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6.25 기념식에도 참석하고, 대통령 주최 위로연 무대에서 6.25 발발의 제1보도를 육성으로 직접 다시 들려주고, 전쟁 탓으로 67년의 타향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나의 인생 스토리를 간단히 소개했다. 그리고 대표적인 참전용사들을 소개하는 역할도 해서 뿌듯하다.
-6.25 67주년에 다시 한국을 찾은 감회는
▲6.25 기념행사의 성격이 종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나 같은 잊혀진 사람을 초청해서 무대에 세운다는 발상이 색다르고, 행사 전체 분위기도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런데 6.25를 맞이하는 한국의 국민들과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미국에서 느끼는 극동지역의 긴장과 위기감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듯하다. 6.25는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다. 6.25 때도 그런 무관심이 남한 전체에 팽배했었는데, ‘무관심’처럼 위험한 게 없는 것 같다. 한국 땅에 다시는 전쟁의 참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나
▲고향이 황해도 재령인데, 일제 때 교육을 받으면서 당시 이북 여러 곳에서 살았다. 17살 때 해방을 맞은 뒤 2년 뒤에 KBS의 아나운서에 응시를 했는데 합격했다. 당시 최연소 합격이 기네스북감이 아닌가하고 농담도 한다.
-6.25 발발 첫 방송 당시를 회고한다면
▲당시 덕수궁 뒤에 있던 방송국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육군 장교가 찾아와 전쟁 발발 소식을 알렸다. 황급히 1보를 만들어 방송을 했는데, ‘큰일이 터졌구나’하는 두려움은 있었지만 전면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당시만 해도 38선에서 남북 군인들의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군이 설마 서울까지 내려오겠냐는 생각에 그날 서울운동장에 축구를 보러 갔었다. 그런데 경기가 후반전에 갑자기 중단되고 장내 아나운서의 경기 중단 발표와 함께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에 비로소 전쟁을 실감했었다.
-전쟁통에 고난도 컸을 텐데
▲북한 쪽에서 들어와 방송국을 장악한 다음 날부터 방송국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아나운서들이 잡히면 죽임을 당했지만, 국군이 반드시 서울을 탈환할 것이라는 신념으로 피난길에 나서지 않고 서울서 숨어 지냈다. 친척 집에 숨어 있다가 군중의 함성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가 북한군이 서울에서 쫓겨난 것을 알게 됐다. 곧바로 방송국으로 가 마이크를 잡고 서울 수복을 알리는 1보를 방송했다. ‘이젠 살았구나’하는 기쁨과 함께 1보를 읊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또 다른 기억에 남는 방송은
▲1949년 김구 선생 장례식 때 효창공원에서 하관식을 담당해 중계를 했었다. 김구 선생의 관이 땅에 묻히던 순간 관 뚜껑을 치던 소리가 ‘땅땅’ 하고 났었는데 그 소리를 전 국민이 들을 수 있도록 좀더 가까이 전하기 위해 엎드려서 중계방송을 했던 생각이 난다.
-이민을 오게 된 계기는
▲방송을 다시 시작한 뒤 미군 심리전 장교에게 발탁돼 일본 도쿄에 있는 유엔사령부 방송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일본으로 파견 근무를 갔었다. 몇 개월이면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쟁이 3년이 갈 줄은 몰랐다. 그러다보니 일본에 정착하게 됐고, 그 뒤로 도쿄와 오키나와 등에서 유엔사령부 방송을 22년이나 했다. 1972년 미국으로 와서 또 45년을 이민 생활을 했으니 67년을 멀리서 조국을 바라보며 ‘나그네’로 산 셈이다. 전쟁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이다.
-수필가로서 책 출간도 많이 했다. 글쓰기는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글쓰기는 거짓말을 보태지 않는 생명 같은 것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 글을 읽고 저와 감동을 같이한다면 그것이 곧 글을 쓰는 의미가 될 것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인데 건강이 남다른 것 같다. 건강 유지의 비결이 있다면
▲뭐 특별히 비결은 없다. 어릴 때 학교에서 항상 가슴을 펴고 자세를 곧바로 지녀야한다는 말을 잊지 않으며, 항상 긍정적인 생각과 늙어서도 꿈과 희망을 잊지 말자는 자세로 살고 있다. 청춘은 물리적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가슴 뛰는 ‘도전’을 한다면 그게 바로 ‘청춘’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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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록씨 약력>
▲1928년 황해도 재령 출생. 89세
▲1945년 평양사범학교 졸업
▲1947년 19세 나이로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 아나운서 최연소 합격
▲1948년 KBS 주최 제1회 방송극 현상모집 당선
▲1950년 6월25일 북한 남침 1보 방송
▲1950-72년 일본서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국 근무
▲1972년 미국 이민
▲가주예술인연합회 회장 역임
▲미주가톨릭문학상 수상
▲저서: ‘하이! 미스터 위’ ‘이민 10년생’ ‘잃어버린 노래’ ‘낙타의 속눈썹’ ‘위진록의 커먼센스’ ‘5분 인물전’ ‘클래식 초대석’ ‘고향이 어디십니까’
6.25 전쟁 발발 제1보 방송자로 한국전 67주년을 맞아 한국에 특별 초청된 LA 한인 올드타이머 위진록씨가 당시에 대한 감회를 밝히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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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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