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프랑스의 대문호 앙드레 모루아가 집필한 ‘미국사’(김영사 간)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앙드레 모루아는 신대륙 발견부터 초강대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500년 미국 역사의 장대한 드라마를 유려한 문체와 심오한 통찰력으로 풀어냈다. 신용석 조선일보 전 논설위원이 번역을 맡아 원작의 미문과 의미를 충실히 살려냈다는 평이다. <편집자 주>
-제국주의의 발호
미합중국 시민은 오랫동안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를 크게 멸시 해왔다. 물론 미합중국도 ‘신의 계시’라며 영토를 확장하긴 했지만 이 점령지는 곧 연방의 주로 편입되었지 식민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헌법은 어떤 경우에도 국기를 따랐다. 1890년 들어 변방지대가 사라지자 일부 미국인은 ‘신의 계시’를 태평양 해안에서 정지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헨리 캐벗 로지는 “리오그란데 강에서 북극해양까지는 하나의 국기, 즉 하나의 국가만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굴착할 필요가 있으며 이 운하와 태평양 방면의 통상을 보호하기 위해 하와이 군도를 지배하고 서인도에 적어도 한 개 기지를 확보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의견은 소수의 제국주의자뿐 아니라 일반 대중, 심지어 상류층 단체인 미국혁명여성회까지도 환영했다. 소수의 자유주의적인 지식인과 평화주의자만 이 주장에 반대했다.
-쿠바의 혁명
아메리카 대륙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쿠바 문제는 미합중국 행정부의 관심사였다. 미합중국은 그 섬에서 사탕과 담배를 수입하는 등 이해관계가 컸지만 스페인의 주권을 인정해 여러 번의 쿠바 혁명에도 공공연히 간섭한 적이 없었다.
1868년 쿠바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북부에서 많은 동정을 표시했고 뉴욕 시에 쿠바 국기를 게양했다. 당시 북부는 남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정부의 권위를 강화하던 때라 서로 같은 입장에서 반란을 진압하려는 스페인 정부의 주권을 존중했다.
1895년 쿠바에 새로운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미합중국의 관세정책으로 쿠바의 농장주가 타격을 받으면서 노임을 삭감하는 바람에 일어났는데 스페인의 발레리아노 웨일러 장군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진압했다. 그가 설치한 강제수용소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사망했다고 전해졌다. 일부 신문은 스페인의 만행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새로 나온 담배 광고를 취급하듯 전쟁을 선동했다. 어떤 신문사는 개전 여부를 걸고 300만 달러의 내기를 걸었다.
-메인호 폭발사고와 스페인에 선전포고
쿠바인의 독립을 위한 열망은 전제 군주정치를 적대시하는 아메리카의 자유주의자들을 기쁘게 했다. 1897년까지 계속된 쿠바의 무정부 상태는 현지에 농장이 있던 미국인들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다. 감금과 심한 학대를 받았던 것이다. 스페인은 반란으로 발생한 손해 배상을 거부했다.
매킨리는 캐나다와 영국의 관계처럼 쿠바에 사실상 독립을 허용하고 스페인이 명예 종주권을 보유하게 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순양함 메인호가 미합중국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쿠바로 떠났다. 1898년 2월 15일 메인호가 폭발사고로 침몰하면서 승무원의 태반이 사망했고 폭발 원인은 우발적인 사고라고만 발표되었다.
미합중국의 여론은 스페인 정부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알라모를 잊지 말라!”고 하던 스페인에 대한 구호가 이제는 “메인호를 잊지 말라!”로 변했다. 전쟁을 원치 않은 스페인 정부는 협상을 시도했고 조사와 조정을 제의하면서 교황의 중재를 희망했다. 그뿐 아니라 쿠바의 자치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매킨리는 이 문제를 강경하게 다루지 않으면 당이 분열될 것이라고 염려해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4월 19일 의회는 미합중국과 스페인이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고 선언했다. 그 전쟁은 아무런 피해 없이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었고 전국은 하나가 되어 열광했다. 민주당과 공화당, 북부와 남부가 하나의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결했던 것이다.
-쿠바, 괌, 필리핀을 얻다
잘 훈련받고 제대로 무장한 미합중국 해군은 실전에 임해 그 우수성을 실증했다. 반면 육군 병력은 8만 명에 불과했고 징집된 12만 5,000명의 지원병에게는 무기와 군복을 지급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나 병력에서 우세한 스페인도 장비가 열등했고 지휘 계통도 엉망이었다. 1만 7,000명밖에 되지 않는 아메리카 원정군은 샌디에이고 항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 해군의 지원을 받아 쿠바를 점령했다.
태평양에서는 듀이 제독이 소함대를 이끌고 마닐라 항에 나타나 독일 제독의 시기와 영국 제독의 호의에 찬 눈앞에서 사병 하나 잃지 않고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 섬 점령에는 저항이 거의 없었다.
스페인은 파리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했으나 조건이 매우 가혹했다. 쿠바를 포기하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을 미합중국에 200만 달러에 할양해야 했는데 이것은 스페인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아메리카에 처음 서방 문명을 전해준 스페인이 그 아메리카에 자신들의 최후의 영토를 잃는다는 것은 자존심 강한 국민에게 매우 뼈저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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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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