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아줌마 텃밭에 지금 사랑이 한창 익어간다. 천방지축 철부지 소년 같은 풋고추가 약이 올라 살짝 붉어가고 토마토는 붉은 드레스로 정열을 자랑하고 있다. 샛파란 오이도 날씬한 허리로 맵시를 뿌리고, 호박, 상추, 근대, 실파, 깻잎도 옹기종기 개성을 뽐내며 낸시 아줌마 사랑을 다투고 있다. 나 역시 걔네들 못지않게 그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상추와 깻잎을 겹쳐놓고 가느란 실파 하나 얹어 강남콩 섞은 보리밥에 쌈장 올려 입에 넣으면 입안 가득 사랑이 넘친다. 낸시 아줌마는 이곳에 와 산 지 40년이 훌쩍 넘었단다. 미국인 남편과 살면서도 고향 먹거리들을 텃밭에 심어서 아침저녁 물 주고 벌레 잡고 어린손자 돌보듯 정성스레 키워 이 사람 저 사람 나누어주느라 하루가 바쁘다.
내가 그녀와 알게 된 것은 정성스레 거둔 채소를 깨끗이 씻어 단골가게에 들러 주는 중이었는데 그 질팍한 경상도 사투리와 인정 넘치는 모습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40여년이 넘게 살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 그녀는 고추장 된장 맛있게 담는 얘기와 손주 사위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다음날부터 나는 그녀의 사랑이 담긴 푸성귀를 받아 먹는 단골이 되었다.
올해 40년만에 처음 고향을 간다고 마음이 들떠 이것저것 묻는 그녀에게 고향이 실망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요즘 세상에는 1년이 다르니 말이다. 비 오는 날 호박 부침개라도 부치면 이집 저집 돌리러 다니던 어린시절, 우린 언제 먹냐고 짜증도 냈었는데, 이웃사촌 인심은커녕 층간소음으로 살인까지 나는 이즈음 낸시 아줌마에게 고향은 어떤 모습으로 맞아 주려나 걱정이다.
실하고 좋은 것 골라 이웃 먼저 주고 내 것은 못나고 작은 것 추스레기 먹는 인심이 아니었던가. 아침 해 뜨기전 새벽 이슬 머금은 싱싱한 것 땄으니 싱싱할 때 가져 가라고 전화하는 낸시 아줌마. 너무도 많이 변한 고향에서 마음의 상처받지 않고 돌아오길 바라며 오늘은 그녀 텃밭에서 거둔 사랑만으로 저녁식탁을 차려야겠다.
동그란 조선호박에 새우젖 넣어 볶고 멸치 다시에 된장 풀어 근대국 끓이고 돌 미나리 살짝 데쳐 새콤달콤 무치고 쪽파는 돌돌 말아 파강회 하고 풋고추 오이는 쌈장에 찍어 먹어야지. 아 참! 밥은 돌솥에 보리와 풋콩 넣어 은은히 뜸 들여 누룽지도 만들어야지. 오랫만에 고향 노래로 기분 내면서 집안 가득 행복을 채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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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금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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