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 5일동안 모든 걸 함께했다. 산호세 남쪽으로 5시간 마리포사(Mariposa) 근처 한 수련원에서 말이다. LA, SF, 시애틀, 캐나다 등지에서 온 이들은 모습 만큼 싸온 보따리들도 달랐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비슷했다. 희노애락, 사랑받고 싶은, 날 알아줬으면 하는, 내 마음을 받아주었으면 하는, 그리고 좌절된 사랑 등등.
내 미션은 마음속 깊이 고이 간직해 놓은 한마디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해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난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는 한마디가 무의식 깊은 곳에서 튀어나왔고, 나는 빙의된 줄 알았다. 그리고 앞뒤 안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 난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난 아버지를 찾아 미국땅에 왔고…그후 세상 끝까지 갔어요. 30-40년을 아버지만 찾아 다녔어요”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5녀 1남. 아버지는 딸바보로 유명했다. 나와 막내동생은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온몸으로 받았다. 1960년대 “사랑한다”는 말은 오글거려서 못하던 시절에, 아버지는 우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부모님 사이에서 잤고, 내가 잠이 들 때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담쓰담, 다리도 스트레칭 시켜주시고, 우리딸 우리딸 하셨다.
신작로 길을 따라 아버지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겨울엔 아버지의 코트에 손을 넣고 걸어갔다. 난 그 아버지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를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40년동안 창고 속에 잡동사니라는 삶의 기억 속에 아버지를 내동댕이쳐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 무의식, 내안의 아이는 그 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았어도 절대 없앨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랑을 가진 나. 함부로 사랑을 주지 않지만, 한번 준 사랑은 거두지 않는다는 것을. 난 faithful한 사람이다. 갈 때는 혼자였지만 올 때는 내 아이를 데리고 왔다. 착한 아이. 그 아이를 데리고 오자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새로운 나를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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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송씨는 UNC에서 심리학을 전공, 융대학원 입학하러 뉴욕에 상경. 골아픈 학업을 포기하고 헤메이다 97년 속리산 암자로 스님되려 입산, 6개월만에 포기. 16년간 불가 수행생활, 5년간 멕시코에서 전파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자유롭게 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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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송(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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