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 10년여간 미국 생활을 해온 나는 대여섯명 이상 1세대 한인을 만나는 자리가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지금 일하고 있는 KCI는 1974년 한인 이민의 봇물(1970-1980년 500%이상 이민자 증가, 센서스 자료) 이 터지면서 한인 교육센터로 따로 만들어진 곳이다. 그때 단초 역할을 했던 분이 그 당시 차이나 타운에서 소셜워커로 일했던 서하나(차이나타운 YWCA 디렉터)씨와 김금영씨란 여성 두 분이다.
최근 모교인 숙명여대 강정애 총장님 방문으로 지난달부터 동문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샌프란시스코 한인 이민사에 대해 더욱 가까이 접하게 됐다. 1952년 졸업하신 황젬마 동문은 오스트리아 한 교회 여성 모임의 지원을 받아 처음 유럽 문물을 익혔다.
이후 미국에 온 황젬마 동문은 남편을 만나 실리콘밸리에서 전자(TeleVideo, Neware 의 전신, 2007년 HP사에 매각) 회사를 세우고, 사립 재단으로 전환 후 후학 양성에 앞장서는 필란트로피의 삶을 살고 있다. 또한 1974년도 졸업하신 박00동문은 장학금을 받은 남편을 따라 미 중부 엔지니어 석박사학위 뒷바라지를 마치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거쳐 현재 사우스베이에서 살고 있다.
1964년도까지 이곳 샌프란시스코도 동양인 입국 금지법으로 인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이민자들은 아주 적은수밖에 없었고, 흑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러 문헌들은 전한다. 그러나 여성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그만큼 좋아졌는지는 의문이다.
한인 여성들은 본국의 남성 위주의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본인의 주도적인 역할을 내세우기보다는 뒤에서서 궂은 일을 해내고 꿋꿋이 살아내는 존재감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나는 여러 미국의 각지 기관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만났던 그런 담담하고 소리없이 강한 한인 여성들을 만나오면서 자랑스러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는 그런 분들을 우리 앞에 내보이며 자랑하고 싶다. ‘여성의 창’에서 그런 순간들을 포착해내며 서로 격려하는 순간들을 만들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김선원씨는 KOTRA, KCI-IIC 등에서 활동. 한국에서는 로레알, 아트선재센터, 월트디즈니 등에서 언론홍보 및 펀드레이징 담당으로 8년동안 일했다. 화가였던 부친을 따라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서 일년을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숙명여대에서 프랑스어 전공, 슬하에 중학생 아들이 있으며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요리법 따라하기를 즐긴다.
<
김선원(KCI,IIC 사업개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