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학증을 받아놓은 85년 1월, 큰언니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양촌에 갔다. 시골 논두렁을 걷고 걸어 한참 가다 보니 큰언니 옆에 어떤 아기가 누워 있었다. 그 애가 바로 나의 첫 조카였다. 난 그 애가 너무 예뻤다. 그 누구도 그 애를 대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나는 유학을 왔고, 일년에 한번씩 한국에 갔었다.
그때 큰언니의 삶은 회오리, 폭풍 속에서 헤메고 있었고, 그 애는 소외되어 혼란 속에 있었다. 무조건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맘에, 15살때 미국에 데려왔다. 조카는 열공하며 개과천선한 삶을 살아 주었다. 그후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짐을 챙겨 멕시코로 명상전파를 떠났고, 5년동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때 조카는 17살. 나름 힘들고, 외롭고, 방황하던 터에 새벽까지 게임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고 나는 그런 조카를 몹시 못마땅해 했다. 그때만 해도 “삶은 악착같이, 열심히, 허튼 짓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나는 조카를 나무랬다.
멕시코라는 엄청난 문화적, 언어적인 차이를 극복하느라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내 눈에는 항상 슬픈 그림자가 있어, 멕시코인들은 날 “슬픈 눈(Sad Eyes)”이라고 불렀다. 그 와중에 어느날 조카가 전화를 했다. “이모, 나 한국에 돌아갈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먹던 밥그릇을 거의 떨어뜨릴 뻔했다. “왜?” “어, 그냥 나 갈래” 워낙 무던하고 속이 깊은 조카이기에 긴 말은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자 갑자기 물밀듯이 조카의 방황, 외로움, 그리움 등 많은 감정들이 내게 전해져 왔다.
순간 조카가 너무 힘들구나 생각하자 눈물이 봇물처럼 터졌다. “아, 미안해, 이모가 네 맘을 몰라주었구나. 이젠 괜찮아, 그래 이모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아무래도 좋아. 그냥 행복하기만 해, 새벽까지 게임해도, 노랑머리를 해도 돼. 대신 한국엔 가지마, 이모는 널 사랑해.”
그후 조카는 지금까지 내곁에 있어 주었다. 결혼하고 애 낳고, 최고의 직장을 다니며 착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때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른 관계가 됐을지 모른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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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송(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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