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페이스북에 지난 기록에 대한 추억 알림이 와 본 적이 있다. SNS는 의도하지 않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 한 자락을 꺼내 그 시간 속으로 불쑥 나를 데려다놓았다. 그곳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지 얼마 안된 아이들이 동네 음악학원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초대받아 찬조 출연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유트브를 보며 곡을 연습하고, 자기 키 만한 기타를 메고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앳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 코밑에 솜털같이 올라온 수염, 어깨와 가슴 품이 많이 남아 마치 형의 옷을 빌려 입은 듯했다. 수줍은 듯 어린 후배들 사이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내 눈은 이내 아이들의 교복 바지에 멈추었다.
바로 그 바지였다. 아이들이 먼 이국 땅으로 오게 되면서도 버리지 않고 간직했던 중학교 교복. 아이들은 이곳 공립학교 미들 스쿨 졸업식에 새로 옷을 사지 않고, 자신들의 교복 바지를 입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여분으로 남겨졌던 바지 단을 최대한 내려 감침질로 꿰매고 곧게 다렸다. 뭉뚝하게 올라온 바지 선을 빳빳이 다리며 아이들이 이곳에 와 새로운 언어와 환경에 적응해야 했었던 힘들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시간들은 몇 번의 다림질로 쉽사리 반듯해지지 않았고, 다림질과 같은 뜨거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형태를 변화해야 하는 것과도 같은 시간들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그렇게 채 1년도 입지 못하고 머나먼 타국으로 건너온 교복. 하지만 아이들은 그 교복을 그리워했다. 자유와 개성의 자유복과 다른 교복 속에는 그 옷을 함께 입은 아이들의 공통의 문화가 있고, 그 안에서 함께한 청소년기의 추억들을 대변하고 있음이리라. 적어도 그 세계를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에게는.
지난주 이곳에 와 두 번째 추수감사절을 맞이했다. 아이는 그때의 기타를 다시 꺼내어 추수감사절 연휴 동안 새로운 곡을 연습하며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며 앞으로 또다른 문화를 형성하며 자라날 것이다. 나 또한 과거 내가 속한 시공간 속의 모든 경험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듯, 오늘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가는 자산임을 느낀다. 우리가 새로움을 추구할 때 그 시작은 바로 내가 서 있었던 바로 그 자리의 작은 발돋움임을, 때론 다림질과 같은 열기를 견뎌내야 하는 시간들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김소형(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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