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남 5녀 중 다섯째이기에 동생이 하나뿐이다. 엄마가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때 동생이 태어났다. 전쟁통에 할아버지를 잃고 30세에 홀어머니가 된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갈등이 최고조일 때, 아버지는 종종 술로 고통을 달래셨다. 술과 여자는 종종 짝이라더니, 아버지는 다른 여인을 만났고, 결국 엄마는 고양이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되버렸다. 이걸 팔자라고 하나 보다.
맘이 따뜻하고, 한량기가 충만한 아버지를 엄마는 무척 사랑하신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외도는 엄마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되었고, 심장병, 홧병 등이 세트로 왔다. 그쯤에 태어난 동생은 엄마의 심리적, 육체적 성정을 그대로 받아, 유난히 예민하고, 본의아니게 까다로웠다. 신경이 예민하니 조그만 소리도 못 듣는 성깔까지 있었다. 그런 동생이 자신만큼이나 민감한 남편을 만나, 짤그락짤그락 15년 하더니 드디어 큰 병을 얻었다.
나는 그때 몸과 마음 200%를 요구하는 회사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술 포함 20일 정도 입원해야 하는데 간호할 사람이 없다고 전화가 왔다. 한국에는 다섯 형제가 있었고, 착한 고모들이 둘이나 있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하지만 동생은 엄마도 안 계시는데, 누군가에게 두려운 마음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나 보다, 나를 찾은 걸 보니.
유난히도 난 동생을 사랑했다. 지금도 동생 생각을 하면 애틋한 마음이 깊을 때는 눈물이 난다. 난 왜 그런지 몰랐는데, 내리사랑이라고 한단다.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물처럼 내려간다고…맞다. 이상하게도, 언니들을 향해서 없는 마음이 여동생에게는 있다.
만사 제겨 놓고 한국으로 갔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동생을 간호했다. 간호라기보다는 치어리더를 했다. 무조건 즐겁게, 가볍게, 긍정적인 기분을 갖게 해주는 게 내 역할이었다. 난 그 역을 너무 훌륭하게 했다. 함께 게임 쇼를 보며 밤낮으로 웃었다. 원래도 잘 웃는 나는 쉬지 않고 하하, 호호 웃었고, 동생은 오히려 수술자리를 걱정할 정도로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획 갔고, 동생은 제때에 퇴원했다. 사람들이 “자매간에 저렇게 우애가 좋아. 미국에서까지 직장도 뺴고 20일을 오다니! 그게 쉬운 일이야~!”라며 부러워하고 칭찬했다. 내리사랑, 난 동생을 사랑하기에 쉽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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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 송(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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