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부터 “행복”이라는 단어를 안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행복하다고 말을 하는 동시에 ‘내가 정말로 행복한 건가?’라는 질문이 나의 마음속에 생겨났다. 그 의구심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생각에 잠길 때면, 기뻐하던 나의 감정은 어느 순간 공허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이 단어가 나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다. 현재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불행’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작가 에밀리 에스파하니 스미스는, 사람들은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녀 역시 그 강박감 속에서 이상적인 직업과, 완벽한 남자친구, 아름다운 집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했다. 행복이란 단어가 ‘자신이 원하는 욕구가 충족이 되어 만족함을 느끼는 상태’라면, 그 누구도 이 단어를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더 좋은 것에 욕심을 낸다. 어떠한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도 인간은 끝내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 할 것이다.
스미스는 사람들의 불행과 절망은 무언가로부터의 결핍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행복하지 않아서 삶이 버거운 것이 아닌 그들이 쫓으려 하는 ‘삶의 의미’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삶에 있는 ‘네개의 기둥’을 설명한다. 사랑으로 서로를 이끌어주는 유대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여주는 삶의 목적, 자신의 최대치를 개발하는 초월성, 그리고 3자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 이 네개의 기둥은 힘든 삶 속에서 우리가 무너지지 않게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스미스의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응급수술은 받은 적이 있었다. 마취제가 들어갈 때 거꾸로 숫자를 세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아들과 딸의 이름을 반복했다. 가족이라는 유대감 속에서, 아버지라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죽는 순간까지도 자녀의 이름을 되풀이하는 초월성을 보여줬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스스로 쓴 이야기며 그의 네개의 기둥은 그의 삶의 의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행복은 잠시 스쳐 지나갈 뿐 영원하지 않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다가도 손을 뻗으면 금세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행복을 쫓는 삶이 아닌 삶의 의미를 먼저 충족시키는 것이 우리의 삶에 더 큰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장선효(UC버클리 학생)>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