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가 남성적인 문학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여성의 권리와 욕망을 표현하는 여성 문학의 시대였다. 80년대의 사회적 성향을 강하게 띄우고 있는 작품들 속에서 섬세하고 감성적인 여성 문학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문단으로 자리잡았다. 90년대 초에 발간되었던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여성 문학의 초입에 있는 작품이다. 작가 신경숙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불륜적 사랑을 하는 소설 속의 ‘나’는 남자로부터 해외 도피를 제안받고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대답을 보류한 채 고향에 내려와 있는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함께 떠날 수 없는 이유를 편지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유년시절은 그와 함께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일곱 살 즈음에 열흘간 자신의 집에서 어머니 노릇을 하던 ‘그 여자’를 회상하며, 한 어머니의 딸로서 자신을 인식해준 그녀를 잊지 못한다. 어머니보다 맛있는 음식도 더 많이 만들어주고, 식구들에게 모진 구박을 당해도 그 여자는 혼자 참고 견뎌냈다. 무엇보다도 세명의 오빠 밑에서 혼자 여자아이였던 자신을 ‘한 여성’ 으로서 존중해주었던 그녀가 고마웠다.
‘그 여자’의 마음속에는 사실 다른 한 여성의 가정을 뺐었다는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밥을 맛있게 만들고 온갖 노력을 해도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 여자는 어린 주인공의 손을 꼭 잡고서는 자신처럼은 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불륜적 사랑에 빠졌을 때는 그에 따른 희생과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주인공이 성인이 되어서 그 여자와 비슷한 사랑에 빠졌을 때도 ‘나’는 자신의 욕심이 모두를 아프게 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점촌할머니와 어머니를 보고 자라왔던 ‘나’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대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나’는 기차에서 내려 역 구내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남자가 준 시계를 잃어버린다. 그녀가 보여준 복선은 도덕적 이유보다는 나의 행동 때문에 상처받을 사람들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작가 신경숙은 ‘불륜’ 서사라는 다소 흔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편지 형식이라는 독특한 문체의 구성으로 많은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어린시절, ‘그 여자’를 통해서 여성으로서 자아를 찾아가는 주인공은 90년대 초의 여성 문학이 다루던 중요한 주제와 이념을 잘 보여준다.
<장선효(UC버클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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