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날아든 파리가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던 어느 날 오후. 포슬린페인팅 작업을 위해 하얀 접시를 펼쳐 놓고 테이블에 앉았다. 색색이 곱게 갈린 안료 가루를 나이프로 덜어내어 타일에 옮기고, 포슬린용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린 후 리듬을 타듯 안료를 섞는다. 오일의 독특한 향기가 후각을 통해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아무 생각도 들어오지 않는다. 머리 위를 돌고 있던 파리의 날센 움직임도 기억에 없다.
정신을 차리고 창 밖을 보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나는 다시 포슬린을 가마에 그대로 구울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지우고 다시 그릴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포슬린 그림의 운명이 달라진다. 안료는 접시와 함께 구워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의 베이스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몇 번이라도 채색작업은 가능하다. 명암처리, 금도금 등의 작업을 거친 후 가마에서 여러 번 구워내는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몇 번을 덧칠하더라도 돌이키기 어려운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첫 가마 소성시의 베이스이다. 베이스는 포슬린페인팅의 밑그림을 말한다. 안료는 섭씨800도 이상의 뜨거운 가마에서 그릇에 깊숙이 밀착되어 전체 그림의 큰 틀이 된다. 만일 베이스를 너무 강하고 진하게 그리면 그 경계와 색이 뚜렷해져 이후에는 채색을 통해 스며들듯 은은하게 명암을 주며 작업하기 어렵다.
포슬린의 베이스와 같이, 처음 자리잡게 되는 생각의 틀, 삶에 대한 신념, 가치관은 우리 영혼의 베이스가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삶의 철학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선택의 순간 어김없이 나타나 그 경계를 드러낸다. 때로 우리는 경계를 만났을 때 그것을 한계로 규정하고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다른 베이스를 갖은 이들을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우리들 각자의 베이스는 서로 다르다. 그것이 비록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그려진 세계일지라도. 그렇기에 타인의 베이스에 대한 이해와, 스스로의 베이스를 자각하며 깨트리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알에서 깨어나 아프락삭스에게로 날아간 데미안 속의 새와 같이. 때론 깨어나오는 아픔이 동반될지라도 그 한걸음이 다음 소성을 위한 또 다른 베이스가 될 것임을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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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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