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면 어느 때와 다를 것없이 화투 판을 꺼내 든다. 아버지와의 무의미한 이 화투 놀이는 이미 각본이 다 짜여진 연극에 불과했다. 그저 모르는 척, 아버지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주면 되는 것이다. 늦은 저녁, 아버지가 잠에 드시면,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온다. 외간 남자와 사랑을 나눈 뒤, 잠자리를 빌미로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이 난다.
1998년에 출간된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은 빈혈에 시달리는 노처녀가 가부장제도로부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죽고, 오빠는 도망을 갔다. 병든 아버지를 간호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소설 속의 ‘나’는 아버지에게 순종적이고 착한 딸이지만 밤이 되면 몰래 밖으로 나가서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다. 그녀의 상반되는 생활 방식이 처음에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아무 능력 없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버린 ‘나’에게 매춘의 일은 유일한 생계 수단이 되어버렸다.
‘나’는 몸의 훼손으로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찾아간다. 밤마다 외간 남자와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다. 그 순간만큼은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온전히 한 남자의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유일하게 표출하는 남자에게 잠자리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게 되는 장면은 안쓰러울 뿐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의 무의미한 화투 놀이를 반복하며, 아버지의 강압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에 ‘나’는 고통스러워 한다. 외출과 귀가를 반복하는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는 ‘나’는 밤마다 매춘 일을 통하여 아버지의 위선적 권위에 저항하며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찾길 바란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무의미한 하루는 우리 사회의 일상과 현실을 비춰주고 있는 것만 같다. 작가 오정희가 말하는 ‘저녁의 게임’이란 해가 저물면 반복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나’의 무의미한 화투 놀이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낯선 남성과 밖에서 벌이는 밀고 당기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저녁 사이에 벌어지는 이 모든 광경은 독자들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장선호(UC버클리 학생)>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