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부음을 듣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친구들의 죽음의 소식이 일상화된 터라 보통 친구의 부음에는 ‘그래 갔구나. 나도 곧 따라 갈 텐데 뭘’하는 정도였는데 말입니다. 왜 눈물이 쏟아졌을까? 아마도 유학생으로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 우리 모두가 너무 힘들게 살았던 기억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 되어요.
1967년 1월 미국에 온지 1주일이 채 안된 저를 찾아 왔었지요. 형은 성큼성큼 제가 살던 아파트의 삐걱 거리는 계단을 올라 왔고,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연락을 받았다며 스스럼없이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형은 미국에 와서 제가 제일 처음 사귄 친구가 되었고, 그 이래로 가족 같은 사이로 지냈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제가 장가를 늦게 가는 바람에 형의 집 식객으로 밥도 많이 얻어먹었지요. 그 후 같은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이기도 했는데 2000년 제가 서울로 돌아가면서 소식이 뜸 했습니다. 그러나 형은 오늘까지 제 마음 속에는 잊지 못할 친구로 남아 있습니다.
형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였고, 한국의 문화유산과 고전 음악에는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금문교와 안개, 고즈넉한 언덕을 가진 샌프란시스코를 사랑했고 그 속의 낭만을 즐기던 멋쟁이였습니다. 그것은 겉 멋 만은 아니었지요. 그 때 미국은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반항이 폭발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반항은 반전 운동, 히피문화, 동성애자의 커밍아웃 등으로 표출되던 혼돈의 시절이었지요. 샌프란시스코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폭풍 가운데서 형은 절제된 인식으로 도전을 소화하면서 시대를 걸어갔던 저널리스트였습니다. 형은 문재도 뛰어 났습니다. 마감시간 전까지는 판판 놀다가도 마감시간 직전에 팬을 잡으면 단숨에 명 컬럼 한 꼭지를 써내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형은 참 마음이 따뜻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좋아 하셨고 항상 밝게 사셨지요. 어려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였지요. 여러 해 동안 스트록으로 말도 잘 못하고 운신도 어려웠지만 만날 때 마다 어두운 표정보다는 기쁜 표정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정 답답하면 필담으로 소통하면서도 마지막에는 ‘말을 못해 너무 답답해’라고 적으며 크게 웃는 모습이었지요. 1년에 한두 번 bay area 에 들르면서도 형을 찾지 못한 것이 못내 한이 됩니다.
근수 형! 정말 미안 합니다. 반신이 불편하여 오래 고생하셨는데 마지막 날에는 투석까지 하며 어려운 투병생활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웠지요. 그러나 아픔과 질고를 다 떨쳐내는 육신의 죽음이 영생을 믿는 우리에게는 참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이 너무 은혜로운 복음입니다.
제가 요즈음 즐겨 부르는 찬송 395장의 마지막 절로 형을 추모합니다.
거룩하신 구주여 피로 날 사셨으니 / 어찌 감사하온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주의 귀한 형상을 나도 입게 하시고 / 하늘나라 가서도 사랑하게 하소서
<
강우정/한국 성서대학교 총장(한국일보 SF 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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