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비가 왔다. 어릴 적 살던 곳은 겨울이면 눈이 왔는데 어른이 되어 사는 이 곳에서는 비가 온다. 어제는 나무지붕을 밟아대는 세찬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오래된 가뭄이 해갈이 좀 될 모양인가 보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마실 나가려던 발은 묶였지만 실망하기엔 반가운 손님이다.
투드닥 투드닥, 땅을 적시는 빗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다가 이내 시원하게 탁 틔어준다. 그러다 창 밖 오렌지 나무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다. 스스로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느끼던 중에 쏟아지는 비를 맞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일까? 오랜 소원이 이루어지는 기분일까? 사실 이 오렌지 나무는, 우리집 뒷마당의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였다. 다른 나무들은 모두 옹기종기 자리를 나누어 잡아 질서 있게 마당을 두르고 있는데, 무슨 연유인지 이 나무만 마당 한가운데 떡 하니 서 있다. 혼자 콘서트라도 하려나 싶어 우습기도 하고, 아이랑 마당에서 공놀이라도 할 때면 거추장스러웠다. 그냥 얌전히 줄 따라 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살짝 미운 눈길을 보낼 때도 있었다.
비와 함께 겨울이 들이닥칠 무렵, 다른 나무들은 모두 남은 잎들을 떨구어 버리고 서둘러 동면에 들어갔다. 헌데 오렌지 나무만 때를 아는 양 모르는 양 아직도 한창이었다. 차가운 비를 맞는 것이 안됐기도 하고 그 와중에 열매를 맺는 것이 기특하기도 했다. 또 고향에 부모형제 두고 멀리 떠나 있는 나나 한여름 화려한 때 못 나가고 덩그러니 남은 저나 매한가지 처지가 아닌가 싶어 이제는 슬그머니 마음마저 간다.
사실, 나는 추운 겨울 주렁주렁 맺힌 저 많은 오렌지들을 보며 맛이 어떨지 내심 걱정인데 저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환하고 풍성하다. 진즉에 예쁜 모양으로 진한 향 풍길 때 제 갈 길 갔으면 좋았을 걸, 철 지난 줄도 모르고 무엇을 기다리느라 저 세찬 비를 맞고 있는 걸까? 그래도 겨울 오렌지는 겨울비의 시원한 해갈을 맛보았으니 그 또한 제 운명의 고유한 기쁨과 자부심이 있겠지. 내 마음에도 풍성하고 환한 미소가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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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선씨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교육공학을 전공하고, Deloitte, IBM 등 컨설팅 기업에서 기업교육 컨설턴트로 7년간 일했다. 2006년 도미 후에는 UC리버사이드에서 교육정책 박사과정을 수료(ABD: All But Dissertation)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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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선(교육학 박사 A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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