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한갓진 오후, 좋아하는 인터넷 블러그를 흝어 보다가 수첩과 연필을 꺼내들었다. 블러거가 읽은 책 목록을 적어 내려간다. 도붓장사꾼 같은 종이쪽지에 적어 두면 필히 하루 이틀만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기 때문에 수첩은 필수다. 사실 나는 기억해 두고픈 글귀를 적어두는 노트, 한 달이 한눈에 다 보이는 캘린더 수첩도 가지고 있다. 이것 저것 적힌 수첩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키가 작고 희끗한 머리칼을 가진 조용한 분이셨다. 선생님이 내는 바리톤의 저음으로 단조롭게 구사되는 영어를 듣고 있자면 졸음이 왔다. 그러면 느닷없는 농담이 날아든다. 대개 선생님의 농담이란 길어서 지루한 데다가 마치 독립선언문 낭독하듯 근엄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그만 좀 하시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런 가운데 소문이 하나 돌았다. 선생님의 영어 교과서 사이에 농담이 빼곡히 적힌 수첩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비록 선생님의 농담이 진부하긴 했어도 그걸 적어와서 읽는 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 비밀 수첩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친구들과 작당을 했다. 선생님은 늘 책가방과 도시락통이 잔뜩 걸려 있는 비좁은 책상 사이를 오가며 교과서를 코앞까지 바짝 대고 읽었다. 바로 그때, 선생님이 지나가며 뒷모습을 보이는 순간을 공략했다.
우리는 민첩하게 허리를 돌려 살짝 엉덩이를 들고 목은 쭈욱 빼고 눈은 있는 대로 크게 떠서 최대한의 시야를 확보했다. 그리고 15센티미터도 안될 것 같은 공간을 재빨리 눈으로 뒤졌다. 정말로 있었다! 흐릿한 글자가 빽빽히 들어찬 자그마한 수첩의 한 면이 보였다. 곧 선생님께서 누구냐? 하며 무섭지도 않은 호통을 치신다. 천천히 몸을 돌려 우리가 제자리에 앉을 시간을 모른 척 내어 주신다. 수업을 어수선하게 만든 범인을 찾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짓다 말고는 그걸로 끝이었다. 선생님과 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영어 문장을 읽어 나갔다.
그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수첩 이야기를 화두 삼지 않았다. 다만 우리도 선생님이 하신 것처럼 못본 척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이 정성스러운 농담을 하시면 우리도 아우성을 치다가도 웃었다. 영어도, 가끔은 모른 척 덮어주는 것도, 요긴한 것은 잘 적어두는 수첩의 지혜도 모두 그때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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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선(교육학 박사 A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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