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여섯 살 무렵 우리 가족은 부산에서 서울로 온 지 얼마 안되어 옥수동으로 이사를 했다. 옥수동 집은 언덕배기에 있는 작은 주택이었다. 골목길을 따라 동쪽으로 얼마쯤 가면 아랫 동네로 내려가는 언덕 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놀이터와 식료품 가게, 버스 정류장 등이 나왔다.
그리고 그쯤부터 나는 아빠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용돈을 받았다. 용돈이라고 해봐야 오십 원에서 백 원이었지만 학교에 간 엄마를 기다리는 지루한 낮 시간에 그 돈은 무척 유용했다. 주로 언덕길 아래 가게에 가서 ‘쭈쭈바’라고 불리던 얼음과자나 신호등을 본 딴 삼색 사탕을사 먹었다. 그러나 그건 별식이었고 용돈이 없던 평범한 날엔 달짝지근한 간식이 늘 마땅찮았다.
그러면 놀이터로 갔다. 모래 위로 시소와 그네만 덩그러니 있는 놀이터였다. 가장자리에는 산사태를 막으려는 듯 높이 쌓아둔 돌담장이 있고 그 위로 아카시아 나무들이 그득했다. 학명은 아까시 나무라는데 우리는 아카시아라고 불렀다. 아카시아 나뭇잎은 반듯하게 꼭 다문 입술처럼 보였다. 그 잎으로 동네 친구들과 잎따기 놀이를 숱하게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아카시아 나무를 좋아했던 진짜 이유는 여름이 올 무렵 피던 하얀 꽃 때문이었다. 아카시아 꽃은 향이 강하고 달콤할 뿐 아니라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꿀벌처럼 꿀만 먹을 재간이 없었으니 꽃을 그대로 먹었는데 한웅큼 먹고 나면 어느새 배도 차고 입에서 꽃내음이 나는 것만 같았다.
아카시아 꽃이 여의치 않으면 집 앞 사르비아 꽃을 찾았다. 작고 길다란 종처럼 생긴 빨간 꽃은 생김새도 신기했지만 톡 따서 빨면 꿀이 꽤 많이 나왔다. 나와 남동생이 경쟁하듯 신나게 꿀을 먹으면 안그래도 얼마 안되던 사르비아 꽃은 금새 동이 났다.
새끼 고양이처럼 사랑스러운 기억들을 되새김질하자니 그때의 달콤했던 맛이 다시 스며드는 듯하다. 창문을 열었더니 뒷마당을 가득 채운 자두꽃 향기가 산뜻한 공기와 함께 흘러든다. 문득 지금 승주 나이가 그 무렵 내 나이쯤인 것을 깨닫는다. 내 아이의 마음속에는 어떤 향기로운 기억들이 담기어 가고 있을까? 자두 꽃을 먹을 순 없지만, 부디 저 꽃내음처럼 사랑스럽고 달콤한 순간들이 가득 담겼으면 좋겠다. 부디 이 어린 시절이 훗날 따뜻하고 보드랍게 마음을 감싸주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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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연선(교육학박사 A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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