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날이면 산에 오른다. 사람도 번거로워 혼자 나선다. 이맘때면, 여름에는 쳐다보기도 싫었던 민둥산을 올라도 좋다. 겨우내 내린 비에 제비꽃, 양지꽃에 살갈퀴까지 한국에서 보던 야생화들이 조로록 피고, 흙먼지 날리던 길에는 보리밭이나 밀밭을 떠메다 옮겨놓은 것처럼 푸르른 풀들이 펼쳐져 눈호강을 한다. 계곡에는 찰찰찰 물이 흐르니 귀호강도 하게 된다. 귀호강은 그것뿐이 아니다. 고요한 산 속에서 청아하게 울리는 새소리도 세파에 찌든 귀를 씻어준다.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은 꽃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손톱보다 작은 꽃 안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무늬가 있을 수 있는지, 거기에 또 암술, 수술까지 있는 모습은 경이롭다. 어느 길목에서는 발에 밟힐까 걱정될 정도로 많은 잠자리 떼를 만난다. 또 어느 길목에서는 무당벌레 집단을 만나는데 잘못 건드렸다간 눈으로 코로 들이닥칠 기세다.
개울가에선 혀를 날름거리며 배 깔고 누워 있는 뱀을 만난 적도 있다. 짐작도 할 수 없는 꽃의 신비, 곤충의 신비 등을 느끼고 나면, 나는 비로소 인간은 대자연에 속한 하나의 피조물임을 느끼며 겸손해진다. 겸손해지지만 나와 내 주변의 자연이 일치되는 충만한 느낌을 받는데, 이것이 바로 산행의 매력이다.
또 하나의 매력을 곁들인다면, 어릴 적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조우하는 것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등산을 다니셨는데, 동네방네 쏘다니는 걸 좋아하던 나에게는 딱 안성맞춤의 취미였다. 등산하다가 너럭바위에 앉아 점심으로 먹던 짜장밥은 일품이었다. 지금도 산에서 너럭바위를 보면 불쑥 짜장밥이 먹고 싶어질 정도다. 내리막길에서 내달리다 바윗돌에 얼굴을 박고 꼬꾸라진 일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얼굴에 흉터가 남지 않았는데, 앞니가 깨지고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는 대형 참사였다. 지금도 내리막길에 다다르면 꼭 그때 생각이 나면서 조심조심 내려가지만, 어릴 적 흑역사가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절로 배어 나온다. 이런 소소한 생각들과 함께 지금은 구순이 다 되셔서 거동도 불편하시지만, 날랜 걸음으로 앞장서 걸으시던 정정했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라 훈훈한 마음이 된다.
어릴 적에 행복했던 일을 지금도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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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란(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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