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코스코에서 꽃봉오리가 몇 개 맺혀 있는 동백나무를 사서 거실에서 키웠다. 며칠을 기다리니 화사한 진홍의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겹동백이어선지 얇은 꽃잎이 화사한 여인의 미소처럼 겹쳐 피어나며 노란 꽃술을 드러내는 자태가 환상적이라 하루종일 거실을 서성거렸다. 꽃이 질까봐 안타까우면서도, 시들기도 전에 몸 전체로 산화하듯이 툭 떨어지는 극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싶기도 했던 듯하다.
어느 날 밤새, 또 집안을 들락거리던 사이 한송이씩 지고 말았다. 결국은 이별이었던 것이다. 선운사의 동백을 보고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란 시를 생각한다. 고창의 선운사를 가본 적은 없지만 책을 통해 그곳의 동백이 처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리란 느낌을 갖고 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십여년 전 이 아름다운 시를 메일해 준 사람은 어릴 적 멘토였던 큰 고모네 큰오빠였다. 좋고 싫음이 분명해 괴팍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 등단은 못했어도 내내 시를 쓰던 오빠였다. 문학과 음악을 사랑하고 또 테니스를 정말로 좋아하고 잘 쳤었다. 내가 르네상스적 덕목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오빠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
이 시를 받고 가슴이 메었는데 , 그 2년 전에 오빠는 육종암으로 신장 하나를 잘라낸 후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이 시를 골라 내게 보낼 때는 전이가 잘된다는 이 암 때문에 두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었으며, 죽음을 준비하던 그 처절한 심정이 내게도 전이되어서였던지 시를 읽을 때마다 눈믈이 나곤 했었다. 이후로도 오빠는 두 번의 수술을 더 받으며 고생하다 이번 겨울에 결국 돌아가셨다. 한국에 가서 한번씩 뵐 때면, 집안의 장남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정말 바른생활 사나이로 살았는데 좀 억울하다고 말하고는 민망해하며 웃던 얼굴이 내내 생각난다.
죽음은 찰라이다. 결연한 이별이다. 그리고 길어서 슬픈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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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리씨는 숙명여대 영문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대학강사를 하다가 1989년 도미했다. CCSF에서 Florist 자격증을 취득해 웨딩 플라워 컴퍼니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프리랜서 플로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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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리(플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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