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하게도 어른들의 임종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밤사이 돌아가셨는데 새벽에 아버지의 부축을 받고 마당에 나가시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바로 전날 귀가하신 후 나를 무릎에 앉히고 늘 하던 과자찾기 놀이를 했기 때문에 어리둥절한 채 지나갔다. 둘째아이 출산을 앞두고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출국 준비를 하는데 임종하셨다고 했다. 백수를 하신 후 자리보존하신 지 단 나흘만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사고로 응급실에 가신 지 몇 시간만에 운명하셨다. 병원에 갈 차비를 하다가 임종 소식을 들었다.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진짜 했다. 어머니는 4월에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 두 번 가서 뵌 것이 전부였다. 가을에 갔을 때 많이 괴로워하셔서 이제 그만 고통 받으시면 좋겠다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곧 운명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시각 희희낙낙 놀고 있었던 일이 뼈에 사무쳤지만, 임종을 못 지켜서인지 한동안은 고아가 되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일년 뒤 가을에 어머니께서 좋아하셨던 단감을 보는 순간 이제 다시는 뵐 수 없다는 현실감이 확 다가와 회복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 사는 것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져 그동안 써왔던 일기, 글, 사진들을 정리하고 태웠다.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둘째가 놀라서 자기가 간직할 테니 태우지 말라고 했지만, 나에게만 의미있는 것은 어차피 정리 대상이 될 것이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대학 때 우리 학번을 담당하셨던 지도교수님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영미소설 강의를 입으로 우물우물 잘 들리지도 않게 했지만 참 예리하고 서구적인(?) 위트도 넘쳤다. 하지만 도통 세상과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 유신 말기의 혼란스럽던 그때 우리는 구심점이 없어 고아처럼 표류했었다. 선배들 말로는 전쟁 때 이북에 모든 것을 남겨두고 미군 통역관으로 혼자 살아남아, 말하자면 소설 ‘광장’에서는 자살을 선택한 이명준의 살아있는 표본이라고 했다. 본인 정년퇴임식에도 억지로 참석해서 이런 의식이 무슨 의미가 있나며 “나는 내 장례식에도 불참할 거다”라는 농담으로 인삿말을 대신하셨다.
교수님도 나도 어쩌면 오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건지 모르지만, 슬픔은 어차피 남겨진 혹은 남겨둘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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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리(플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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