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신이다. 멀리서 사는 딸이 해드릴 건 없고 미안한 마음을 덜고자 2주 전쯤 소포를 보냈다. 발이 불편하다는 엄마의 말씀이 마음에 걸려서 신발을 하나 사러 돌아다녔다. 다른 사람의 신을 신어보고 사는 일이 쉽지 않으나 다리품 팔아서 간신히 하나 건졌다. 아무리 엄마와 딸이라도 평소엔 쑥스러워 꺼내기 힘든 말을 편지로 적어보낸다. 세월에 장사가 없다더니 만년 청춘으로 사실 것 같던 우리 엄마도 늙는구나.
“나 경로우대 카드 나왔어. 내 친구들은 아직 우리가 노인도 아닌데 카드 쓰는 게 어색하다고 하는 거야. 하긴 우리 나이가 아직 노인은 아니긴 해.” 그렇게 시작한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머릿속은 복잡한 지하철 속에 장사진을 이루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젊은 시절 열심히 일하고 노후에 복지를 누리는 것은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일 것인데 왜 불편하신 걸까? 복지를 꼭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밀어넣었다. 나도 말하기는 쉽지만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일이라 당사자 마음까진 알기 어렵다. 전화를 끊고 생각을 해보니 엄마는 카드가 아니라 당신은 아직 늙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날씨가 선선해진 요즘 저녁마다 산책을 하고 있다. 하늘은 매일 다양한 색을 보여준다. 어제는 파란색 물감을 뿌린 듯한 하늘, 오늘은 홍조를 띤 새색시처럼 붉게 물든 하늘이다. 바야흐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왔구나. 가을에 노을 지는 황혼은 아름답다는 표현도 부족하니 황홀함에 취한다는 표현이면 와닿을까? 우리 인생의 황혼도 그렇게 황홀할 수 있을까? 나이 들어서 육체가 쇠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나이듦의 특징이 어디 병들고 약한 것만 있던가? 노익장의 현명함으로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으며 집안의 어른 역할을 해주실 수 있다.
어릴 적 내 불평과 불만의 과녁은 항상 엄마였다. 엄마도 본인의 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건만 자식들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왜 그렇게 엄마의 희생은 당연했을까? 내가 이제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불평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때로는 그저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신 것조차 사랑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김미혜(한울한국학교 교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