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찾아오는 치매는 본인뿐 아니라 가정의 큰 문제다. 언제나 건강할 것 같은 사람도 세월에 장사 없는 법이다. 내가 생각하는 치매는 특별한 병이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세월의 병이다. 엄마가 치매에 걸리면 더는 엄마의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늘 쉽게 받아먹어서 고마운지도 몰랐던 엄마의 음식은 엄마의 세월이었다. 설탕은 행복의 단맛, 소금은 인생의 눈물, 간장은 오늘의 고생, 고춧가루는 어제의 고통, 엄마의 손맛은 세월의 양념이 버무려져서 최고의 맛이 되는 것이다. 아플 때도 엄마 손은 약손이고, 엄마가 요리를 해주면 기운이 솟아서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 엄마의 요리는 곧 엄마의 사랑이다.
막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막내 눈높이로 놀아주시곤 했다. 퍼즐을 맞추자고 하면 퍼즐을, 인형놀이를 하자고 하면 인형놀이를 해주셨다. 심지어 식탁 밑에 들어가서 놀자고 하면 식탁 밑에 들어가시는 것도 싫다 안하셨다. 내가 오히려 죄송해서 할머니 힘들게 한다고 하면 ‘아니다. 내가 더 즐겁다’ 하시면서 놀아주셨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집에 와서 주무시는 날엔 하루만 더 주무시고 가시라고 사정하는 아이들 때문에 몸살을 앓기도 하셨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려서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엄마는 안되는데 다 되는 것이 할머니 아닌가? 바로 엄마 위에 엄마~
나는 가끔 할머니를 찾아뵙는다. 어제는 나를 기억했지만, 오늘은 또 내가 누구냐고 하신다. 할머니의 얼굴 속에 엄마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리고 그 얼굴에 다시 내 얼굴이 겹쳐진다. 몇 해 전 할머니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혼자 걸을 수도 없는 제한된 삶을 사신다. 가끔 나는 할머니의 남은 시간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지금 이 시간은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문득 그것이 할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겨진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오늘도 옛이야기 보따리를 하나둘 풀어놓으신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재미있다. 때로는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이야기라도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도 나중에 우리 할머니처럼 풀어놓을 이야기 보따리가 많은 삶이라면 좋겠다. 후회 없는 인생은 없겠지마는 가능하면 더 많이 사랑하고 후회는 적게 해야지. 나이 들고 약해지면 잃는 것이 많겠지만 주어지는 삶에서 마지막까지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김미혜(한울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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