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화려한 휘모리를 연주해 주세요.” “느리거나 길면 사람들이 지겨워하거나 싫어할 거예요.” 연주회를 준비할 때 한국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다. 밀스타인의 ‘파가니니아나’ 또는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오로지 박자의 빠르기 때문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독 한국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에만 ‘빠르기 또는 길이 = 선호도’라고 생각을 한다. 아마도 한국음악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아 어린시절 듣던 흥겨운 민요가락이나 듣는 순간 가슴이 벅차게 울리는 사물놀이 장단 등을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물론 단순한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으나 나 역시도 어릴 적이었지만 가야금 산조의 휘몰아치는 듯한 휘모리나 가장 빠른 장단인 세산조시(단모리), 그리고 기교와 테크닉을 요구하는 현대음악에만 몰두해서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연주하는 것이 잘하는 연주라고 생각해 기계처럼 화려한 테크닉만 구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지켜보시던 선생님께서는 산조의 가장 느린 진양조가 얼마나 아름다운 가락인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제맛을 살리는지에 대해 누누이 말씀하시곤 하셨다.
진양조는 산조의 첫시작을 알리는 가장 느린 곡으로, 서양음악으로 치면 라르고나 라르기시모에 해당하는 빠르기로 느리지만 그 안에 우조, 우조 계면조, 우조(돌장), 평조, 평조 계면조, 계면조, 계면조 변청, 계면조 본청 등 다채로운 조로 이루어져 있다. 산조의 절반인 30분 가량을 차지하는 이 진양조를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서는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손으로 느리고 긴 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섬세하거나 심오하고 깊은 농현을 구사하며 줄의 떨림까지도 느껴가며 각 조의 느낌을 달리해 연주를 해야 한다. 라르고에 가까운 느린 음악이지만 깊은 농현을 할 때에는 가슴 깊은 곳에서 심장을 치는 듯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 왼손으로 구르거나 꺾을 때에는 애절함이 묻어나기도 하는 다양한 감정을 담은 음악이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듣는이의 내면 깊숙한 감정을 건드리게 되기에 이 느리디 느린 음악을 들은 사람은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소름이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듯한 경험을 한다고 말한다.
진양조처럼 느리고 다채로우면서 다양한 변화로 심금을 울리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음악은 흔하지 않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요즘, 오늘 하루만이라도 진양조의 제대로 된 느린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손화영(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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