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우리는 친구 아나의 고향인 유럽의 작은 섬으로 여행을 갔다. 우리 가족 말고도 한 가족이 더 초대되어 세 가족, 아이들까지 모두 열명이 뭉쳐 온 섬을 이리저리 누비며 보냈다. 그 섬은 사방이 아름다운 해변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바람의 방향에 따라 섬의 한쪽면은 파도가 일렁이지만 그 반대편 해변은 수영장처럼 잔잔해 아이들이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친구는 아침마다 바람의 방향을 체크해서 그날 우리가 갈 해변을 정해 단체 메시지로 알려주곤 했다. 그렇게 찾아간 해변은 잔잔하고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땡볕에 시달리며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터득한 우리는 아들에게 챙이 넓은 모자에 긴팔의 래쉬가드와 반바지까지 완전무장을 시켜 놀게 했다. 그렇게 이틀 쯤 놀던 아이는 수영복을 벗고 싶다고 했다. 그 해변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 입고 있지 않았던 데다가 매일 수영복을 세탁해 말리는 것도 여간 귀찮지 않았던 터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부터 아들은 세상에서 제일 자유로운 아이처럼 해변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자 친구들의 아이들도 하나 둘씩 수영복 입기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아이들은 모두 맨몸으로 자연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벌거숭이로 신이 나서 뛰어다니던 아들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은, 몇 달이 지났어도 보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자유로움과 가벼움을 느끼게 해준다.
공동체를 이루고 그 관습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옷을 입지 않고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때와 장소에 맞는 복장을 갖추지 않는다면 부끄러울 뿐 아니라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얼굴을 가꾸고 좋은 표정을 짓는 것만큼 ‘어떤 옷을 입느냐’는 그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기 시작한 옷인데 어찌 보면 제약이 되어 버린 것일지 모른다.
학생 시절의 배낭여행 중 유럽의 누드비치에서, 나는 참 세상에 별난 사람들이 다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20년이 흘러, 타인의 시선에 시달리느라 사람이 얼마나 진정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지 알게 된 나는, 해변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거리낌없던 아이들과 함께 혼이 빠지게 웃었던 나는, 이제 좀 다른 생각을 한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아이처럼,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힘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최은영(섬유조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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