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을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향수에 젖을 때면 고국의 아름다운 추억을 불러내곤 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지금 내 추억의 장은 아프리카다. 1993년 한국에서 우간다까지 편지 왕복에 한달이 걸리던 시절 남편과 나는 1살, 3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곳에서 첫 한달을 지내는 동안 호불호 요인들이 드러났다. 검은 피부, 빨간 흙, 초록 나무는 호불호 없이 아프리카적인 느낌을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냄새는 첫 한달동안 나를 가장 괴롭혔다. 모든 음식에서 풍기는 아프리카 냄새 때문에 입덧하는 임산부처럼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인공적인 빛의 기운이 미치지 않는 그곳의 밤하늘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천체의 향연이라는 표현이 과하다 싶지 않게 자연의 불빛으로 수놓은 하늘은 문명세계의 네온사인 거리를 부끄럽게 했다. 그곳의 해와 달과 별들은 천문학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사람과 교감하는 인문학적 존재이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장, 나에게 아프리카는 그런 곳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현지인 가정 첫 방문이 떠오른다. 주일학교 아이를 심방하느라 찾아간 마을에 낮은 흙집들이 있었다. 흔히 보는 그런 집들이지만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아픈 할머니 때문에 결석했다는 아이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깜깜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서서히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창문도 불빛도 없는 3평 남짓한 공간 안에 할머니가 누워계셨다. 자세히 보니 흙 바닥에 얇은 매트 하나를 깔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식구 4명이 살고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몇 일을 앓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듯했다. 시멘트 바닥인 우리 집이 너무 호화롭게 보였다. 내가 저들과 어떻게 함께할까? 흙탕물을 마시는 저들과 빗물을 정수해서 마시는 우리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 부끄러움과 절망감에 몸과 마음이 한차례 홍역을 치뤘다.
아프리카를 떠나 미국에 온 지 3년, 일회용을 재사용하고 수도꼭지의 물을 흘려버리지 못하고, 화장실 물을 모아서 내리고, 빨래를 자연 건조하는 우리는 이곳에서도 이방인이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방출하며 소비 천국의 위력을 과시하는 미국 사회 속에서 나는 또다시 몸살을 앓고 있다. 아프리카와 미국 사이, 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선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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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박주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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