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 고향을 두고 온 아버지는 이남 땅에서 형제 이상의 우정을 나눈 친구가 있었다. 그분 역시 혈육이 다 북에 있는 실향민이었다. 우리는 그분을 고씨 아저씨라 불렀다. 아버지와 같은 직장 동료이자 사는 집도 한 동네라 아주 가까웠다. 양쪽 부모들이 한 형제처럼 지내니 당연히 우리 형제, 그 집 아이들도 한 형제처럼 컸다. 고씨 아저씨네와 함께한 추억은 내 어렸을 적 기억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다.
엄마가 큰 사업을 하다 있는 재산 다 날리는 것도 부족해 많은 빚을 졌다. 내가 고3때 일로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빚이 얼마 안 되는 줄 알았던 아버지는 엄마의 빚을 갚아 주다가 더 많은 빚이 있다는 걸 알고 크게 좌절했다. 형편이 어렵게 되면 가까운 사람이 제일 먼저 등을 돌린다는 걸 난 어린나이인 그때 알아버렸다. 하지만 고씨 아저씨는 달랐다. 쌀을 사면 절반을 덜어 오고, 하다못해 설탕을 사도 반을 덜어 왔다. 어디 그뿐인가! 수없이 많은 그 기억들은 사는 내내 잊혀지지 않는 가장 큰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본인 자신한테 상상 이상으로 엄격했다. 독일 철학자 칸트처럼 하루의 일상 자체가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게 사셨던 분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자존심을 논해 무엇 하겠나! 그 당시 무너진 자존심으로 살아 있다는 자체가 아버지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고씨 아저씨는 아버지의 그런 성격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약방이 두 군데가 있었다. 아저씨는 아버지가 혹시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실까봐 한겨울 폭설이 내리던 날 두 군데의 약방을 돌아 다니면서 아버지의 인상착의를 알려 놨다. 키가 작고, 곱슬머리에, 검은색 가죽점퍼를 입은 사람이 쥐약을 사러 오면 절대 팔지 말아 달라고…
물론 아버지는 시도도 안했다. 하지만 추운 겨울날 절박한 심정으로 약방을 다닌 아저씨를 생각하면 난 지금도 눈가가 젖어든다. 아버지 임종 무렵, 의식없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일어나라며 절규한 아저씨! 그 심정이 어떨지 두 분이 같이 해온 지난 세월이 말해줬다. 지금은 두 분 다 고인이 됐지만 평생을 지켜낸 두 분의 우정에 난 진심어린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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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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