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난 빨강색을 즐겨 입었다. 내복, 옷, 신발, 가방 다 빨강색이어서 등교 길에 오를 때면 거울 앞에서 ‘빨강 나’를 확인하곤 했다. 어느 날도 습관대로 점검을 하고 학교에 갔는데 수업 중 우연히 바지를 쳐다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뿔싸~ 내복만 입고 바지를 안 입은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게 꿈이었으면’ 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중요한 행사에 슬리퍼를 신고 간 경우, 중요한 서류를 빠뜨린 경우, 마감 날짜를 잘못 안 경우. 다행히 모두 꿈이었다. 그럴 때마다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처녀시절 난 음악, 커피, 비의 조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비 내리는 날 감미로운 선율에 기댄 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곤 했는데 한번도 그 순간을 실컷 누리지 못했다. 어떤 방해로 중단되어 마음 한켠에 늘 아쉬움이 남곤 했다. 어느 날, 앞에는 탁 트인 바다가 보이고 뒤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는 별장 같은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별장 전체에 흐르는 은은한 음악과 찰싹 거리는 파도소리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감성을 자극했고, 공간을 가득 메운 커피향은 마시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꿈 같은 순간이었다. 바다와 내가 하나가 되는 듯했고, 인생의 모든 묵상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즐거운 설렘이 충만해질 때쯤……이게 현실이 아니고 꿈이라는 걸 깨달으며 그 모든 상황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적이 있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는 시공의 장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한다. 기쁨, 사랑, 소망을 불러오는 밝고 긍정적인 것들, 때로 너무 좋아 현실이라고 믿기 어려운 삶의 순간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인생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원하지 않는 반대쪽을 마주해야 할 때도 많다. 슬픔, 고통, 좌절, 수치... 꿈같이 행복한 현실 속에 취하는 순간 어느새 동전의 다른 면으로 빠져나가 있는 우리 자신을 본다. 늪지대 같은 현실 속에서 울부짖으며 버티다 보면 지긋지긋한 고통은 이미 지나간 악몽이었음도 알게 된다. 꿈과 현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영향력 있는 인생의 장인지 논란도 많지만 나의 관심은 꿈과 현실 두 영역을 넘나들며 우리 마음의 무게추를 기울게 하는 그것이다. 형통과 고통은 삶을 지탱하는 실존적인 두 기둥이기에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삶의 지혜를 배운다.
<박주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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