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무척 추웠다. 날로 야위는 어머님을 바라보니 마음이 저려왔다. 오래 못 간다는 의사 말을 오진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머님 옆에 하루라도 더 머물면서 간호하고 싶었지만 오래 휴가를 내지 못해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되돌렸다. 이렇게 떠나는 것이 죄송하다고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그렇게 마음을 졸인 3주가 지난 후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 메세지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서울 오빠에게 전화를 했더니 “너는 여기 오지 않아도 된다. 아버님이 너에게 전하라고 당부하셨다.” 다시 언니와 동생에게 전화하니 “몇주 전에 어머님 보고 갔잖아”라며 말렸다.
다음날 직장에 가서 휴가 신청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운전중이었는데 갑자기 숨이 막혔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픔이 밀려왔다. 차를 세웠다. 운전대를 잡고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얼마나 울었을까. 곧 돌아가실 거라고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후회가 나를 옭아맸다. 무엇 때문에 미국에 왔는지 한이 맺혔다. 결혼하기 전 25년 동안 키워준 엄마에게 효도 한번 못해보다니. “미안해요. 엄마. 미안해요.” 어깨까지 흔들며 울고 있는 나에게 엄마가 옆에 있는 느낌이 왔다. “울지 말아라. 사랑하는 내 딸아.” 찢어질 것 같이 아프던 가슴이 조금씩 풀렸다. 비행기표를 사고 전화를 하니 모두들 꾸짖었다. “왜 언니 고집만 피우는 거야? 왜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는 거야?” 병원 영안실로 가도 쌀쌀맞게 대하는 듯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손님들이 떠난 후 가족끼리만 모였다.“다들 수고 많이 했다.” 아버님은 모두에게 그렇게 말씀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와 남편을 쳐다보았다. 난 아버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고 한국에 나타났기에 꾸중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들에게 고맙지만 특히 미국에서 온 명수와 네 남편에게 제일 고맙다.” 예상을 벗어난 뜻밖의 말씀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오빠 언니 동생 모두 놀라는 얼굴 표정이었다. “너와 네 남편이 그 많은 친척들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 주었다. 고맙다.” 내가 힘들까봐 한국에 오지 말라고 다른 자식들에게 당부했지만 아버님의 속마음은 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챘다. 아버님의 진심을 듣는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김명수(버클리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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