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하고 강한 아빠의 맏딸로 자라서인지 나도 모르게 말투에 애교가 배어 있다. 아빠 친구분들이 어릴 적 나를 ‘살살이’라 부르시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눈웃음에 말투도 애교스러워 그렇게 부르셨던 것 같다. 어릴 때 아빠가 말씀이 없으시면 내 눈에는 왠지 화가 난 것처럼 보여서 기분을 풀어드리려고 이런저런 얘기를 소곤거리거나 하고 싶은 말을 이리저리 돌려 듣기 좋게 포장하는 것이 몸에 밴 듯하다.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말투로 얘기를 하다 보면 저절로 웃는 표정을 짓게 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볼 때 나는 늘 웃는 얼굴이라 인상이 좋다는 말도 가끔 듣는다.
예전에는 이 말투가 나 스스로도 참 마음에 안 들어서 고치려고 해보기도 했는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이제는 장점이 되어 처음 만나는 어색한 자리를 좀 더 편하게 해주고 어렵거나 난처한 얘기를 할 때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웃으면서 말을 거는 이에게 퉁명스레 반응하는 사람들도 드물어서 다른 이들과 말이 오고갈 때 대화가 부드러워진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부분 그 사람이 하는 말로 보여지는데 말투로 인해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낫게 보이니 감사한 일이다.
말이 둥근 나는 말에 각이 진 사람과는 이제 거리를 두게 된다. 말투가 뾰족하면 그에게 정이 가지 않고 그런 이에게 다가가는 게 피곤해서 함께하는 자리는 피하려고 한다. 좋은 뜻의 말이어도 그 말투에 각이 서면 귀가 닫힌다. 강하게 말한다고 결코 그 말의 힘이 세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 먹을수록 늘어야 할 포용력이 나잇값도 못하게 메말라 가는 것 같지만 지금은 말의 결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편하다.
몇 년 전부터 쳐지기 시작하는 입꼬리와 미간 사이의 주름이 어릴 때 아빠가 화가 나 보이셨던 이유였던 것을 거울을 보며 깨닫는다. 무표정할 때의 거울 속 내 얼굴도 화가 나 있는 듯 보여서 요즘은 의도적으로라도 입 끝은 올리고 양 눈썹 사이의 힘은 뺀다.
이제는 내 얼굴에 책임을 질 나이가 됐다. 중년 이후의 얼굴은 지나온 삶이 투영되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의술이 발달해서 앞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날 만큼을 더 살아갈 수도 있으니 오늘부터라도 그 긴 시간을 담아갈 내 얼굴을 위해 ‘말투’와 ‘말본새’에 더욱 더 신경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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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섬유조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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