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애틋한 사랑을 돌아가신 후에야 들었다. 아버님이 일본군으로 징병당했을 때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끝까지 이긴다고 떠들고 있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울어가고 있었다. 전쟁터에 가면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쟁터에 싸우려 가는 걸 피할 수도 없었다.
어머님은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내복을 하나 사서 길거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바느질 실땀을 하나씩 메꾸어 갔다고 했다. 그 한 사람 다치지 말고 살아 돌아오라고 바느질 실땀에 고리를 묶어 하나씩 만들 때마다 실땀과 고리 만드는 사람의 소원과 정성이 들어가 이루어진다 하였다. 어머님이 사람들 북적거리는 길거리에 앉아 창피도 무릅쓰고 모르는 사람에게 허리 굽혀 절을 해가며 바느질 땀 하나를 부탁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바느질 땀 백개가 넘어야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였다. 아버님은 군복 안에 그 내복을 항상 입고 계셨다. 어느 날 겉옷을 벗고 보니 그 내복에 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그 내복을 버리지 못했다. 햇볕 있는 양지 바른 곳에 가서 한마리씩 이를 다 잡아 죽인 후 다시 그 내복을 입으셨다. 그러면서 어머님을 항상 그리워했다 하였다.
어느 날 아버님이 소속해 있던 부대의 반이 만주로 가라고 발령받았다. 다음 날 아버님만은 남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며칠 후 만주로 갔던 군인 모두가 전사를 했고, 일본에 남아있던 군인들에게도 후퇴할 경우 자진해 명예롭게 죽으라고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고 일본 황제가 무조건 항복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중 아버님이 탄 기차가 원자탄 핵이 떨어졌던 히로시마를 지나쳤다. 아버진 기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처참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하였다.
뉴욕에 갔을 때 UN 본부 빌딩 안을 아버님과 같이 견학한 적이 있다. 그 곳 방 하나에 히로시마 빌딩 파편의 녹아내린 흉칙한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버님은 그때를 회상하고 계셨다. 원자탄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기차 창문으로 직접 보고 실감하던 1945년의 어느 하루를.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아버님이 살아서 오셨기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니 감격스럽다. 또한 어머님의 애틋한 사랑을 들으며 나 또한 남편을 위해 주님께 성심껏 기도해보고자 다짐한다.
<
김명수(버클리문학회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