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처음 유학으로 왔을 때 나는 이 나라에 낯설음을 느꼈다. 한국과 비교하면 넓고 넓은 영토에서 나는 내 스스로가 마치 우주 안의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작은 존재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 뛰어 내가 있던 우물에서 나올 수 있는 개구리가 된 것만으로도 내 자신이 대견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시점에 밖으로 나왔을 때는 아프고 아픈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렇게 저렇게 아무쪼록 살기도 바쁜데 그 힘듦이 삶을 이어가는 데 더욱 느리게 만들었다. 누구보다 삶의 힘듦을 잘 정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행복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서로의 힘듦에 등급을 매겼다. 나는 느꼈다. 대체 누구보다 얼마만큼 힘들어야 모든 이들의 힘듦이 당당해질 수 있을까 하고.
그 힘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항상 내일 있을 무언가에 대해 고대하고 소망했다. 그러나 바라던 미래에 왔는데 아직도 그들은 찌질한 현재에 머물러 있는 거라고만 느끼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바라던 미래에 왔지만,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물 흐르듯이 흐르는 그들의 삶들이 물에 오롯이 비춰졌을 때 어쩌면 일그러져 있는 것 같아 보이듯이, 제 3의 물체에 보여지는 것에 의해 자신의 삶을 측량했다. 또한 그들은 누군가의 오늘을 바라며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미 자신의 내일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시차를 측정해보기도 했다. 같은 시공간 안에 살면서 먼저 가 있는 시간과 그들의 높은 울타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포기하기도, 좌절하기도 하며 굳게 먹은 마음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개미가 된 나에게 있어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위에서 바라보더라도 굽어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다들 개구리가 되어 우물 밖을 나올 때, 뛰는 이 위에 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우물 밖으로 뛰어나와 개구리가 된 자신을 기억하며, 자신의 올챙이시절을 기억할 때, 그들이 가진 벽을 뛰어넘을 것이다.
<김예은(UC버클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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