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렀던 첫 연애가 종지부를 찍은 뒤 몇 번의 계절이 변하고, 전 애인에게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의 첫마디는 “여전하네”였고 그 뒤로도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여전하다는 말을 몇 번 반복했다. 교정기도 벗고 얼마나 독하게 살을 뺏는데 여전하다니! 눈물로 지새운 힘겨운 나날들을 거쳐 그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차분하고 성숙한 여인이 되었는데 여전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이 후기를 들은 친구는 전 애인에게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낫겠냐는 위로 아닌 질문을 했고 이 주제는 한참이나 우리 사이에 흥미로운 안줏거리가 되었다. 물론 억양의 차이가 있겠지만 변했다는 말은 왠지 그가 사랑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늙어버렸다는 뜻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없이도 멋있게 살아온 진취적이고 이지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충족시켰다는 만족감에 잠시나마 기뻐했을 것 같다.
여전하다는 말은 “너 없이도 잘 산다” 신경 쓴 듯 안 쓴 듯한 스타일링에 들인 시간과 공을 비웃는 멋없는 말이다. 가끔 예전 일기장을 읽으며 깜짝 놀라고는 하는데 그 이유는 예전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나 자신 때문이다. 결국 내가 뭔가를 적었던 마음과 깨달음은 몇 표현을 제외하고 얼추 똑같았다. 나는 몇 년 전에 비해 성격과 성향, 삶을 바라보는 시선 등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믿고 있었고 암묵적으로 그런 변화의 방향이 긍정적이라고 확신해왔다. 하지만 매번 똑같은 고민과 생각을 적어내려가며 스스로 발전하고 있다고 믿으며 칭찬해오고 있었던 것일지도. 전 애인에게서 듣는 여전하다는 말만큼이나 맥빠진다.
주체적인 선택의 연속과 특별한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선택들은 사실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이었을 수도 있고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던 어차피 같은 선택을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나”라는 대단히 복잡한 존재를 바꿀 만한 대단한 경험이나 선택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긴, 이런 생각과 수다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나도 참 여전하다.
<신선영(UC버클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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