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남편은 한국에 일이 많아져서 한국이 주거주지가 되었고 미국에는 몇 달에 한번씩 들르는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되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말처럼 우리 가족 내에서 남편의 정신적, 기능적인 역할이 상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의 역할 중 하나는 갈등 조정자였다. 나는 아이들과 트러블이 생기면 남편에게 대신 한마디 해줄 것을 요청하곤 했다. 직설적으로 훈계하는 일은 남편의 몫이어서 나와 자녀들은 서로 불편한 말은 안해도 되는 좋기만한 관계였다. 그런데 중간 역할을 하던 남편이 사라지자, 나와 아이들이 직접 부딪쳐서 갈등을 해결하는 상황들이 생겼다. 어느 선까지 참을 수 있고 어느 선부터는 건들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기까지 나와 아이들은 첨예하게 대립하며 협상의 규칙을 정하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편안해졌다.
또한 남편은 만능 수리공 역할도 맡고 있었다. 손 갈 데가 많은 오래된 하우스에 살면서 어딘가 고장나거나 망가지면 금방 뚝딱뚝딱 고치고 손 보는 재주가 있었다. 남편의 부재 중에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처음엔 핸디맨을 불러야 하나, 남편이 출장 올 때까지 기다릴까 고민했지만, 이제는 우리도 간단한 수리는 웬만큼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셋이서 그럭저럭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주에는 딸아이가 대학 기숙사로 떠났다. 딸이 떠나자 당장 고양이를 돌보는 게 내 차지가 되었다. 딸의 역할은 고양이 관리자였던 거다. 아마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딸이 가족 내에서 맡았던 다른 역할들도 더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나와 아들은 또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을 맡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일상을 살아가게 되겠지.
현대 사회는 가족 구성원의 이동, 해체, 합류가 빈번하고 특히 미국에 사는 가족들은 이런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한 명씩 빠져나가는 상황은 마치 보드 게임, 젠가(Jenga) 나무더미에서 도막을 하나씩 쏙쏙 빼낸 탑을 보는 듯하다. 빈 공간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구성원간에 서로 의지하고 잘 지탱하는 한편, 멀리 있는 가족과의 정서적 교감에도 신경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빠졌던 조각을 모아서 다시 쌓았을 때, 더욱 견고하고도 새로운 탑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더 사랑하고 많이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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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하(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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