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안 좋았던 일도 세월이 지난 뒤 보면 더 좋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시내버스도 가지 않는 외곽에 신설된 중학교에 우리 반에서 혼자 배정받았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스쿨버스를 놓치면 고개 넘어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고 학교 주변에는 집들 말고는 아무 가게도 없는 외딴 곳이었습니다. 서울과 달리 지방은 아직 고등학교를 시험보고 들어가던 때에 한 학년이 네 반밖에 없는 신설 중학교에 배정되고 보니 모두들 나를 안되었다는 듯이 동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눈이 펑펑 오는 날 스쿨버스도 학교로 가는 고개를 넘어가지 못해서 고개 앞에서 내려 엉금엉금 기다가 걷다가 학교까지 갔던 것도, 개나리나 탱자나무 울타리 둘러진 집들과 미나리꽝(미나리를 심는 논)을 걸어서 학교로 갔던 것, 학교가 끝나면 일부러 친구들과 걸어서 집에 오면서 아카시아 나뭇잎을 가위바위보 하면서 하나씩 손가락으로 튕겨서 떨어뜨리는 놀이를 하고, 누군가의 묘지 앞 조금 평평한 곳에서는 물구나무 서기도 했던 것들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지방이지만 시내에 살았던 내게는 다 즐거운, 그 학교에 배정받지 못했으면 얻지 못했을 특별함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여름에 뇌출혈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려워진 가정형편이었지만 엄마는 등록금이나 스쿨버스 값 같은 것은 항상 제일 먼저 주시고 거의 매일 콩나물 국, 콩나물 반찬밖에 없었어도 돈 걱정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고생하는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나는 착한 딸이 되려고 했었고 헌신적인 선생님들의 수고로 중학교를 잘 마치고 원하던 고등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건강히 잘 자랄 수 있었고 키도 반에서 큰 편에 속했던 게 거의 매일 먹었던 콩나물 덕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콩나물을 매일 먹었다고 했더니 그럼 이젠 질리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는 지금도 콩나물로 만든 것을 다 좋아합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견뎌봤기에 가난한 유학생, 신학생, 목회자 가정의 생활도 잘 지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뒤돌아보면 원하지 않았던 힘든 상황들이 있었지만 좋은 선생님과 훌륭한 엄마 덕분에 잘 견뎌온 것 같습니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지금 어려운 상황 가운데 계신 분이 있다면 잘 견디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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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희 기모치 소셜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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