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쯤이면 비가 올 줄 알았으면서도 다 끝내지 못한 정원 일에 괜한 안달이 난다. 며칠 오고, 짬을 주겠지 싶었는데, 비는 땅이 마를 만큼의 여유를 쉽게 주지 않았다. 나무와 나무줄기에 휴면오일(Dormant oil)을 뿌려 줘야 애벌레가 부화하지 못하고 겨울을 나게 되는데, 비 때문에 쉽게 그 타이밍 맞추기가 어렵다. 그래도 약을 주고 사나흘은 비가 오지 말아야 하니 약 치는 일은 기다려 볼 일이다.
바람과 물을 막아줄 겉옷을 입고, 장화를 신으니 그나마 젖은 땅에서도 할 일이 보인다. 다 차려면 몇 날은 걸리겠지 하고 놓아둔 빗물 저장통은 벌써 가득차 있다. 게다가 물통 수면을 떠다니는 단풍잎으로 멋을 더하니, 허드렛물로 쓰기엔 아까운 마음마저 든다. 그래도 한 해 정원 일을 마무리하려고 모은 물이니, 아낌없이 쓸 양이다. 우선 여름내 물을 아끼려고 화분 밑에 두었던 화분 받침을 모두 빼내, 모아둔 빗물 시원히 뿌려가며 닦는다. 흙 묻은 호미와 모종삽도 닦고, 한 해 동안 굵은 가지 잘라 내느라 이가 나간 로퍼도, 늦가을까지 삐죽삐죽 자란 가지 모양을 잡아 준 전지가위도 빗물 부어 가며 힘 좋은 수세미로 박박 닦았다.
한자락 햇살 찾아서 나란히 세워 물기를 빼고, 기름 발라 보관하면 끝인데, 그걸 기다려 주지 않고, 타닥타닥 창문을 때리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곧 그 비는 주르르 뭉쳐 창을 타고, 벽을 타고 내린다. 토닥토닥 땅에 부딪혀 내리는 빗방울은 흙과 콘크리트, 만나는 것에 따라 색도 소리도 달라진다. 닦아 놓은 것들을 수건으로 대충 말아 가라지에 두고, 커피 한 잔 만들어 비를 본다.
방울로, 빗줄기로 보이던 비는 톡톡, 잘잘, 쪼로록 고운 소리가 되어 마음까지 편안하게 한다. 눈을 감고 들으니 이만한 음악도 없지 싶다. 여기에 ‘카를로스 나카이’의 피리 연주를 더하니, 다 끝내지 못한 정원 일에 대한 조바심도, 감기로 입원까지 하셨다는 친정아버지에 대한 근심도 좀 덜어진다. 그래서 화려한 기교가 있는 것도 아닌 그의 연주를 두고 사람들은 ‘영혼의 해독제’라 했을까?
눈을 감고 빗소리에 그의 연주 소리에 집중해 본다. 두려움과 근심을 그의 피리 소리에 묻어본다. 그래도 잎 없는 가지에, 누런 낙엽 위에 비가 내리니, 마음 한구석에 아득하니 그리움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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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혜(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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