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건만 연일 비가 내린다. 발목 묶는 눈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멋없이 중얼대며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한 거리를 지나 딸과 발레공연을 보러 간다. 운전대를 잡은 딸의 옆얼굴을 흘끗흘끗 바라본다.
배역만 바뀐 똑같은 광경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운전하는 엄마 곁에서 목청 돋워 노래를 하는가 하면 친구얘기 학교얘기를 하며 나의 아이들과 1년에 한두 번씩 들르던 조금은 부담(?) 되던 공연장. 나의 여유나 취미라기보다 이민생활의 각박함에서 취하지 못한 문화생활을 아이들은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쩌면 부모로서의 교육적인 면도 수반되었으리.
그러한 세월들이 지나 이제 성인이 된 딸은 보이지 않는 약속이나 이루듯 내손을 잡고 함께 다닌다. 비라도 맞을새라 공연장 앞에 내려주고는 차를 파킹하고 달려오는 딸의 모습은 그때의 나를 닮았다. 크리스마스면 지나칠 수 없는 발레 공연 ‘Nutcraker’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관람객이 많았다. 우리는 주최 측에서 세워 놓은 포토존 앞에서 줄선 관객들을 비집고 서서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다.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대왕( Nussknacker und Mause Konig)이 1816년 E. T. A. Hoffmann이 발표한 작품으로. 차이콥스키(Tchaikovsky)의 발레 작품 ‘호두까기 인형’의 원작이 된 작품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작은 서곡’ 이 감미롭게 실내를 메우며 막이 오른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한 거리에는 초대받은 파티장으로 향한 가족들이 삼삼오오 지나간다. 음악과 발레가 어우러진 파티장(주인공 클라라의 집)에 나도 함께한 듯 출렁거렸다.
클라라는 장난감 기술자인 드로셀마이어로부터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으며 인형의 전설을 듣는다. 옛날 어느 왕국에 사는 공주가 생쥐의 저주를 받아 흉측한 모습의 얼굴을 갖게 되었는데 청년이 호두를 깨물어 공주에게 건네주자 공주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생쥐 대왕은 청년을 못 생긴 호두까기 인형으로 만들었고 진심어린 사랑을 받아야 저주에서 풀린다고 했다.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이 선물을 나누어 들고 돌아간 이브의 밤 클라라는 오빠인 프리츠가 짖궂게 망가뜨린 호두까기 인형을 가여워 하며 붕대를 감아 침대에 누이고 사랑으로 돌본다.
그 밤 클라라는 꿈속에서 왕자로 변한 호두까기인형과 함께 크리스마스 랜드를 여행한다. 귀에 익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발레의 진수인 꽃의 왈츠를 감상하며 창조주의 조화로 완성된 인간의 몸이 완전한 예술품이 아닌가 생각했다. 멜로디의 강약에 따라 구르는 옥구슬 같은 몸동작에 다시 한 번 감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얼굴 흘끔 보며 행복해 하는 딸의 모습 에서 내 어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화평의 물줄기에 무안한 감사드린다. 또 우리는 곱게곱게 노 저어 가리 임 기다리는 그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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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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