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를 낳고 얼마되지 않아 몸도 맘도 많이 힘들었을 당시 영성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세미나 중, 지금 나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생각지 못한 질문에 대답을 못하니 그냥 떠오르는 형상이나 단어를 말해 보라 했다. 그때 무심코 내 입에서 ‘나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런데 그 나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왠지 울컥했다. 그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한 아름드리 나무였지만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큰 아름드리 나무를 뿌리도 없이 겨우겨우 떠받치고 서 있는 형상이 나인 것 같아서였다. 불안했었다. 그 시절 난 정말 위태로웠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남편과 지금은 성인이 된 큰아이의 어린 손을 잡고 미국유학을 떠나와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낼 때였으니 위태롭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질문을 나에게 해본다. 지금의 나의 대답도 ‘나무’다. 그때와 같은 가지와 잎이 흐드러지게 풍성한 아름드리 나무다. 하지만 모습은 같은 나무지만 분명 다른 나무다. 뿌리가 없어 불안하고 위태로웠던 그 나무가 아닌, 지금 나의 나무는 비옥한 땅에 물 줄기를 찾아 뿌리를 깊게 내려 단단히 서 있는 나무다. 같은 모습의 나무가 이리도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힘들고 위태로웠던 그때에 비해 삶이 윤택해졌거나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가 아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기까지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가꿔주시는 분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만남들이 하나하나의 뿌리가 되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만남 가운데 나누었던 기쁨과 아픔의 눈물들이, 같은 꿈을 꾸며 흘렸던 땀방울들이, 그 결실을 보며 벅찬 감격으로 뛰던 심장 박동 소리들이 나의 나무에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었다. 그 단단한 뿌리가 자양분이 되어 지탱해 주었기에, 때로는 새들이 날아들어 둥지를 틀고, 맺은 열매도 나눠 먹으며, 그늘을 만들어 쉬어갈 수 있기도 하는 아름드리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오면 잎이 바래져 거친 비바람에 앙상한 가지도 드러낼 것이다. 그럼에도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돌아오는 봄에 또 다시 새 싹을 틔우며, 풍성한 잎과 열매를 맺어 서로 나누며 곤한 몸과 맘을 쉬어갈 자리를 마련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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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초향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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